18page


18page

춘암 박인호 선생은 1908년 1월 18일 천도교 대도주(大道主)가 되어 천도교의 정신적·경제적 지주가 되었고 그 조직을 활용하여 개화문명의 보급과 독립사상 고취를 위해 활동하였다. 1919년 2월 21일 3·1독립운동의 민족대표 손병희의 명으로 천도교 보관금 중에서 5,000원을 최린(崔麟)에게 지급하여 3·1독립운동 경비조로 지원하였고 2월 28일에 천도교 이종일(李鍾一)·이종린(李鍾麟)·윤익선(尹益善) 등과 함께 협의하여 〈조선독립신문〉을 천도교 경영 인쇄소 보성사(普成社)에서 몇만매를 인쇄하여 3·1독립운동 때에 전국으로 배포케 하는 등 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드디어 3월 1일이 되자 천도교 대도주로서 3·1독립운동의 중앙지도체 49인 중 한사람으로 활동하다가 일경에게 피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