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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현(崔益鉉, 1833. 12. 5∼1906. 11. 17)의 본관은 경주, 자는 찬겸, 호는 면암(勉菴)으로 포천현 신북면 가채리에서 태어났다. 1855년(철종 6) 출사한 그는 사헌부 지평, 이조정랑, 신창현감을 역임하고, 1868년 사헌부장령이 되어 흥선대원군의 실정을 공격하는 사직소를 올리고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 당하였다. 1873년(고종 10) 동부승지로 관직에 복귀하였으나, 대원군의 폭정을 비판하는 이른바 계유상소를 올리고 다시 사직하였다. 결국 이 상소는 대원군의 10년 집정을 종식시키는 결과를 가져 왔다. 최익현은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자 여러차례의 상소를 통하여 한·일수교를 반대하였다. 1905년 최익현은 74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임병찬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순창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대마도로 이송되어 옥중에서 순국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