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2page


462page

1922 - 55세 베이징 시즐먼 근처 얼옌징으로 이사하다. 아내 이은숙이 밀사로 국내에 들어왔다가 서울에서 규오를 득남(8월 17일)한 뒤 겨울에 베이징으로 돌아가다. 소설가 루쉰, 러시아 맹인 사상가이자 시인 에로센코 V. Eroshenko, 타이완 사람 판븐리앙 등과 교류하면서 자유협동사상 문제로 크게 고민하다. 1923 - 56세 신채호, 김창숙 등과 의열단 조직을 후원하고, 신흥무관학교 출신을 중심으로 다물단을 조직·지도하다. 9일, 중국 후난성 한쉐이현 양도촌에 이상촌 건립을 계획하다. 1924 - 57세 4월,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한국 아나키즘 운동의 시원)을 조직하고 기관지 〈정의공보〉를 발간하다. 1925 - 58세 3월, 거물 친일파를 처단한 다물단 활동가인 아들 규학이 상하이로 떠나고 딸 규숙이 베이징 공안국에 1년 동안 구금되다. 하루 사이로 두 손녀(규학의 딸)가 성홍열로 세상을 떠나고 며칠 뒤 아들 규오가 죽다. 7월 하순, 아내 이은숙이 귀국하다. 이후 두 사람은 다시 만나지 못하다. 김창숙과 함께 내몽골에 무관학교 설립을 계획하다. 천안문 남쪽 용딩먼 안 관인시 후통으로 이사하다. 10월, 다물단이 또 다른 친일파 거물을 처단하다. 1926 - 59세 2월 2일, 서울에서 아내 이은숙이 막내아들 규동을 낳다. 톈진 프랑스 조계지 다지리로 이사하다. 1927 - 60세 5월, 나석주 의사의 의거 뒤 아들 규창과 함께 지난, 쉬저우 등지로 돈 한 푼 없이 떠나다. 10월경, 톈진 빈민가 진탕치아오 샤오왕장으로 돌아와 토방에 소금죽 한 그릇을 앞에 놓고 김종진(김좌진의 6촌 동생)과 아나키즘을 논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