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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 - 45세 합니다에 신흥강습소 교사를 건립하다. (교주 이석영, 교장 이철영) 1913 - 46세 3월, 신흥강습소 교장 려준과 교감 윤기섭, 무관학교 제1기 졸업생 김석, 강일수 등을 중심으로 신흥학우단을 조직하다. 해외 독립운동 구심을 만들기 위해 자금을 마련코자 단신으로 은밀히 귀국하여 제자 윤복영 집에 머물다. 3월 28일, 아들 규창이 태어나다. 1915 - 48세 8월 20일, 악명 높은 종로경찰서와 미와 와사부로에게 붙잡혔으나 가까스로 풀려난 뒤, 서울 체류 내내 일제 감시가 계속되다. 1917 - 50세 8월 30일, 아들 규학의 혼례를 빙자하여 아내 이은숙과 귀국하다. 1918 - 51세 11월, 아들 규학과 혼인하는 고종 조카딸 조계진의 신부례를 이용해 고종과 접촉하여 베이징 망명계획을 추진하다. 민영달이 5만원 자금을 지원하여 베이징에 거처까지 마련했으나 고종이 갑자기 세상을 뜨면서 뜻을 이루지 못하다. 1919 - 52세 고종 국장을 계기로 독립선언과 대중봉기를 계획하고 거사 직전 해외 독립운동세력 결집을 위해 베이징으로 망명하다. 4월,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25명)으로 피선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기초작업에 참여하다. 5월, 신흥강습소를 고산자로 이전하고 신흥무관학교로 개명하다. 1920 - 53세 베이징으로 돌아가 가족과 합류하여 호우구로우옌에 거처하면서 신채호, 김창숙, 김규식 등과 활동하다. 1921 - 54세 4월, 아나키스트 류자명을 처음 만나다. 5월, 볼셰비키혁명 이후 러시아를 방문하고 돌아온 조소앙의 정세 보고에 실망하다. 6월, 김창숙, 신채호 등과 새로운 독립운동으로 자유공동사회 추진운동을 전개하다. 10월, 정화암(본명 현섭)과 이을규·정규 형제와 교류하다. 정화암과 함께 베이징 근교 하천(용딩허) 부지 개발계획을 상의하고 자금모집에 나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