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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영 기념관 李會榮 紀念館 남산 기슭 우당 友堂 이회영 李會榮 가문과는 인연과 내력이 깊은 곳이다. 경주이씨 백사공파 으뜸이 되는 백사 白沙 이항복 李恒福이 남산 북쪽에 살았다. 쌍회정이다. 백사 9대손 귤산 橘山 이유원 李裕元 은 백사가 살던 집터를 수습하여 다시 쌍회정을 회복하였다. 이곳에서 우당과 6형제 등 가솔들은 시련에 처한 나라를 구하고자 뜻을 도모하였다. 쌍회정에서 몇 백 걸음에 이를 수 있는 곳에 상동교회를 세운 것도 우연이 아니다. 남산자락이 북쪽으로 이어지면서 작은 능선을 이루는 곳에 종현성당 鐘峴聖堂(명동성당)이 있고 그 앞쪽 일대는 저동 苧洞 이라고 한다. 갑신정변이후 청나라에서 온 위안스키 袁世凱(원세개)는 이곳에 있는 거대한 저택을 숙소로 정했다. 이회영네 집이었다. 이회영 가문이 남산자락에 남긴 흔적과 기록은 여럿이다. 그들이 독립운동을 위해 국경을 넘은 지 110년 만에 비로소 남산 북쪽에 돌아왔으니 이회영 기념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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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당 이회영 인간 이회영의 폭은 넓었다. 막힘도 없었다. 그는 조선의 지배이념인 성리학을 넘어 양명학(강화학파)에 몰입한 소론 출신이었다. 열 정승을 낳은 집안사람으로서 과거시험이 아니라 신학문을 절에서 공부했다. 종을 풀어주고 과부가 된 여동생을 개가시킨 근대인이었고, 숲장수 출신 목사와 벗하면서 평민들의 교회 지하실에서 새 하늘을 도모했다. 백지 위임장(헤이그 외교독립운동)을 받을 정도로 황제와 가까우면서도 정작 공화주의자였고, 조국과 겨레를 한없이 사랑하되 주인 없는 공평한 세상. 더 많은 자유를 만인이 누리는 현실을 꿈꾼 거침없는 아나키스트였다. 그는 언제나 자기 내부에서 발견한 모순들을 타파하면서 새로운 경계로 이동해갔다. 그는 가장 부자였고 가장 가난했다. 의로운 생각이 바로 행동이었던 그는 패배를 몰랐고 실패 또한 올랐다. 그의 피는 맑고 뜨거워 늘 순혈의 속도로 내달렸다. 가장 심연이 가장 표면이었다. 그는 자유다. 그가 곧 자유였다. 스스로가 모든 해방이었다. 그는 내내 전투체제이면서 한없이 고요했다. 호수가 활화산이었다. 그는 모든 행동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이름과 모습을 드러내는 일을 스스로 잊었다. 그는 가장 앞이면서 가장 나중이었다. 그는 자신이 나아갈 수 있는 마지막까지 나아갔고, 자기 시대에서 나아갈 수 있는 마지막까지 나아갔던 최후의 인간이었다. 그는 난 앞에서 칼을 얻는, 예술가이면서 동시에 무장 투쟁가였다. 난초 한 이파리에 조선도, 왕도, 선비도, 민중도, 혁명도 다 들어 있었다. 그의 말과 칼과 시(묵란, 음악, 전각 등)는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