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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봉기 군중은 추풍령 주재 일대헌병 분견대로 향하다가 폭우와 일모로 일야가 지연되었는데 그날밤 추풍령 헌병대 운물을 ○○동지를 이 방화 소각했다. 이 사건으로 추풍령에는 일본 관헌이 대거 보강되었다. 익조 의거 군중은 다시 합세하여 추풍령으로 향하다가 도중에서 무장 일헌병과 충돌하여 일대 수라장이 되었다. 여기서 주동자 11명이 피체되고 3명은 피신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피체된 11명은 헌병대와 구치소를 옮겨가며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그리고 재판 긑에 공을 비롯한 안준 안병문 장복철 신상희 김용선 남도학 임봉춘의 8명은 1년 2개월에서 1년 6개월형을 받고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고 이장로 장출봉 김용문 3명은 6개월형을 받고 공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공은 ○미체질이 병약하신데다가 심한 고문을 받아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는동안 말기에는 건강이 극도로 쇠약해갔다. 그러나 악독한 일제는 형기가 차도록 공을 석방해 주지 않았다. 우리 민족은 일제하에 이와같은 기미 3.1 독립운동으로 수 많은 애국애족 지사들이 피를 흘리고 옥고를 치루면서 상해임시정부를 수립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의 역사와 정신과 자주성을 만방에 과시했다. 기후 일제의 패망으로 우리는 8.15 광복을 마지했다. 위와 같이 영동 매곡의 의거로 옥고를 치룬 11인 지사 중에서 오문 출신이 3인이나 된다는 것도 자랑스러운 일이지만 이 거사 자체가 오종회 전 종손이신 공을 위시한 ○종인 3인이 주도하신 거사라는 데 더욱 큰 뜻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열선조의 위국충정을 계승발휘하신 소치로서 오종회의 명성과 직가를 드높인 장거가 아닐 수 없다. 공은 출옥 후 ○○에 불도조를 다시 이곳 ○사동으로 이봉하면서 묘하로 이척해 오셨다. 그러나 공은 고문과 옥고의 여독으로 신음하시다가 단기 4265년(서기 1932) 임신년 12월 13일 애석하게도 조국의 광복을 못 보신채 36세를 일기로 조세하셨다. 정부로부터는 건국훈장 애족장이 수여되었다. 공의 유택은 당초에 현 신흥국민학교 경내 위치에 모셨던 것이나 학교 설립 관계로 이 자리에 옮겨모셨다. 이에 공이 생전에 사표적인 애국애족정신과 출중하신 효친지심을 발휘하여 오종 중 전말의 전통적 충효사상을 몸소 실천하신 공의 숭고하신 행적을 만종원이 오래도록 기리기 위하여 오종회의 이름으로 공의 묘전에 이 비를 세운다. 단기 4324(서기 1991) 신미년 9월 일 순흥안씨 양도공파 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