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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재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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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어윤희 선생(1878.6.30~1961.11.18) 선생은 우리나라의 위대한 여성 독립운동가 중 한명으로서 동학혁명 때 남편을 잃었습니다, 여학교를 졸업하고 외딴 섬에서 전도사로 일하다 1919년 3•1운동 때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시가행진에 앞장섰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2년간 옥살이를 하였습니다. 우리 교과서에서는 유관순 선생을 주로 다루고 있지만 어윤희 선생 역시 감옥에서도 쉬지 않고 항일투쟁에 앞장섰던 인물입니다. 당시 서대문 형무소에는 선생을 비롯하여 많은 여성독립운동가들이 투옥 중이었으며 투쟁의 의지를 더욱 견고히 하였습니다. 어윤희 선생은 1919년 12월 크리스마스 이브에 옥중만세시위 투쟁을 전개하였고 1920년 3월1일 3.1운동 1주년 기념식을 옥중에서 유관순 열사와 같이 만세투쟁으로 시행하였습니다. 엄청난 고문과 당장 오늘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 사방에서 들리는 비명과 신음소리. 그 안에서도 끊이질 않는 만세시위. 가까스로 옥중 만세시위를 진압한 일본교도관들은 만세시위 주동자를 색출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그 와중에 유관순 열사는 지독하게 고문당하여 고문후유증으로 순국하게 됩니다. 그 후, 고문과 회유에 마음이 약해져 일본인 간수의 밥을 나르던 우리나라 여인을 붙잡아 그들의 반민족적인 행동을 질책하며 따끔한 훈계를 통해 스스로 무엇을 잘못한 것인지 뉘우치게도 하였습니다. 결국 선생에게 영향 받은 이러한 여인들이 독립투사들의 비밀 연락원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 큰 변화가 역사에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감옥에서 나온 뒤 선생은 여성들을 대상으로 민족의식고취와 교육활동에 혼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조용히 지내기에는 선생의 역량과 영향력이 너무나 커진 후였습니다. 3.1운동의 항일투쟁경력을 인정받아 선생은 개성지역의 민족운동 단체 지도자 역할을 맡게 됩니다. 특히 개성지역 감리교의 지도자가 되었고 해외작전을 위해 국내에 숨어있는 독립운동가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는 위험한 임무를 직접 수행하였습니다. 더욱 대단한 것은 이러한 시기에도 여성의 권리와 권익을 위해 앞장섰다는 점입니다. 선생은 그 동안 분산된 여성운동계도 단결된 단일조직으로 통합함으로써 근대 한국여성운동사상 일획을 긋는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였습니다. '근우회'를 창립하여 여성의 공고한 단결과 지위향상을 이루어냈고, 운동 목표로 봉건적 굴레와 일제침략으로부터의 해방을 제시하였습니다. 근우회 조직은 지도부의 민족주의계(종교계), 사회주의계 여성운동가는 물론 여학생, 직업여성 등 지식인 여성과 여성농민, 여성노동자, 전업주부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의 여성을 망라하였고 1930년까지 118개 지회가 설립되는 등 그 영향력이 엄청났습니다. 그 후 선생은 1931년 5월 '신간회'가 해소 된 이후부터 일선에서 물러나 아동복지활동에만 헌신하였습니다. 1937년 감리교의 지원 하에 개성 유지의 도움으로 개성지역에 ‘유린보육원’이란 고아원을 설립하고 고아들을 돌보았으며 해방 후 월남하여 서울 마포에 이를 재건하여 복지활동으로 남은 생을 보냈습니다. 선생은 돌아가시기 전까지 고아원에서 아이들을 돌보다 1961년 11월 18일 유린보육원에서 별세하셨습니다.출처 한韓문화Times 2017.1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