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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하 이천(利川)에 거주하던 박영순(朴英淳) 등 14명의 소년들이 1939년경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조직한 「황취소년단(荒鷲少年團)」에 참여하여 회계로 활동하였다. 이 단체는 일명 「독수리소년단」이라 하였다. 1941년 11월 이천군 장호원리(長湖院)에서 모 단원이 '한민족이 일제의 압박에 신음하고 있으므로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고 설득하자, 이에 공감하여 황취소년단에 가입하였다. 박영순을 제외한 나머지 소년 대원들은 모두 장호원 제1소학교에 다니는 4~6학년 학생들이었다. 이들은 독립운동을 하려면 자금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여, 밭을 개간하고 채소를 가꾸는 열성을 보이기도 하였다. 「황취소년단」은 1942년 2월 하순경 장호원 읍내 곳곳에 붙인 「한국독립과 민족단결」을 촉구하는 벽보를 붙였다가 발각되어 존재가 세상에 알려졌다. 습자지와 한지에 먹으로 쓴 항일벽보를 조장 김순철(金淳哲, 당시 14세)이 김만식(金萬植)에게 건네주며 시내에 붙이라고 하였다. 박영순 단장은 이처럼 단원들을 시켜 장호원 읍내에 벽보를 붙이는 외에 이들 유인물을 우편으로 전국 각지의 현직 군수들에게 발송하기도 하였다. 그 내용은 일제가 곧 패망하니 한민족은 그들에게 협조하지 말 것이며, 한민족의 단결로 자주독립을 이루자는 요지의 내용이었다. 더욱이 버스에 붙은 항일격문은 서울 등 대도시로 퍼져 사태가 더욱 심각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그는 항일벽보사건 일주일 후인 3월 초순경 동료들과 함께 장호원주재소 유치장으로 연행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다. 당시 상황에 대해 '개성 송도중학교 입학을 며칠 앞두고였어요. 벽보사건이 터지고 약 8개월여 동안 유치장에서 옥살이를 했습니다. 물론 입학은 취소되었고, 매일 왜경들에게 시달리는 것이 지긋지긋했습니다'라고 회상하였다. 그 뒤 이천경찰서로 이송된 후 1942년 10월 박영순·곽태현(郭泰鉉) 등과 함께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경성지방법원 여주지청으로 송치되어 40여 일 동안 다시 취조와 고문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려 2004년에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