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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 여운형 피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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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7월19일 낮 12시쯤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두 발의 총성이 울린다. 7월의 뙤약볕을 뚫고 날아간 흉탄은 일생을 나라 걱정으로 보낸 한 거인의 가슴을 검붉은 피로 물들인다. 거인의 이름은 여운형이다. 몽양 여운형은 1918년 상하이에서 청년 동포들로 민단을 조직해 광복운동의 터전을 마련했고, 1919년에는 임시정부 수립에 힘을 보태며 임시의정원 의원이 됐다. 언론을 통한 항일투쟁에도 앞장선 그는 1934년 조선체육회장을 맡아 1936년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살 사건을 주도했다. 광복 후에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스스로 위원장에 올랐다. 그는 초대 대통령을 지낼 수도 있었다. 광복 직후 매일일보에서 조사한 ‘조선을 대표하는 정치인’에서 그는 33%의 지지를 얻어 당당히 1위에 올랐다. 미군정 존 하지 사령관이 미국 정부에 보낸 보고서에도 “남쪽에서 대통령 선거를 하면 국내파 여운형이 당선된다. 차점자는 중국파 김구이고, 미국파 이승만은 3위다”라는 내용이 실려 있다. 하지만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된 조국’이었다. 여운형은 우익의 이승만, 좌익의 박헌영, 민족주의 세력의 김구 등이 한 뜻을 갖도록 하기 위해 발로 뛰고 또 뛰었다. 일제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자마자 둘로 갈라진 강토를 하나로 만들기 위해 김일성을 찾아가기도 했다. 북에 다녀온 것을 트집잡는 미국을 향해서는 “집주인이 제 집에서 아랫방으로 내려가건 윗방으로 올라가건 손님들이 웬 참견인가”하고 일침을 놓았다. 이런 여운형에게 미군정은 “보기에는 그럴듯하지만 전혀 쓸모가 없다”는 의미로 은도끼(silver ax)라는 별명을 붙였다. 그런 거인이 19세 소년 한지근이 쏜 총에 맞아 숨을 거두고 만다. 그토록 바라던 광복의 꿈은 이루지만 통일 건국의 기쁨을 누리지 못한 채…. 그를 피격한 암살자의 배후로는 백색 테러조직인 ‘백의사’(白衣社)가 지목된다. 하지만 그들의 뒤에는 장택상 수도경찰청장이 있었다는 게 여러 사학자들의 주장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여운형의 암살은 이승만을 지지하는 미군정의 ‘작전’이었던 셈이다. - 출처 : 경향신문 2011.0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