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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 조선의용대 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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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 영어: Korean Volunteers Army) 또는 조선항일의용군(朝鮮抗日義勇隊) 혹은 국제여단(國際旅團)은 대장 김원봉과 조선민족혁명당의 주도로 1938년 10월 10일 중국 후베이 성 한커우(漢口)에서 결성된 독립군이다. 조선민족전위동맹 산하의 단체로 분류된다. 중국의 2차 국공합작으로 국민당정부의 통일된 후원세력을 얻은 조선의용대는 국민당 정부군의 지원부대로 창설되어 중국 본토에서 일본군과 대항하여 싸웠으며 대원들은 국민당정부로부터 매월 식비 20원과 공작비 10원 씩을 중국 측으로부터 지급받았다. 조선의용대는 큰 틀에서는 한중 평등 합작의 형식을 갖추었지만 실질적으로는 국민당 내 장개석 직계인 남의사 계열의 인사들의 영향력하에 있었다. 국민당 정부는 이들을 좌익혁명가들로 판단했으며 최전선에 이들을 배치했다. 1939년 2월 약 7000명의 조선인 부대가 광주 부근에서 반란을 일으켜 일본인 장교들을 죽이는 사건들이 있었는데 이러한 징병자들이 의용대에 합류하였다. 의용대는 전투부대가 아니었다.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를 모두 구사할 수 있는 대원들이 많았으므로 선무공작 즉 선전 업무를 맡아 일본군에게 전단을 배포하고 확성기를 이용한 방송을 하였다. 이것은 그들이 팔로군 지구로 이동한 후에도 변치 않았고, 1945년 8월에 가서야 전투부대로 재편성되었고, 1945년말 만주로 들어가 전투부대로 규모가 커졌다. 임시정부의 일부 인사들은 조선의용대가 중국 국민당 정부 군사위원회의 관할 하에 있는 중국 부대라고 폄하하는 발언을 하였으므로 그들은 정체성을 확실히 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1941년 김원봉과 의용대내의 라이벌이었던 공산주의자 최창익은 의용대가 화북으로 이동하자 중국 공산당과 함께 김원봉을 화북으로 오지 못하게 하고 김무정, 김두봉, 한빈 등을 내세워 화북지방의 의용대 통제권을 장악했다. 이때부터 조선의용대는 남의사의 영향력에서 벗어났으며,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으로 개칭된다. 이들은 북조선의 성립 후에 연안파로 일컬어진다. 의용대의 전체 통제권을 상실한 김원봉이 1942년 7월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참여하자 의용대의 일부는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되었고, 김원봉은 군무부장에 취임했다. - 출처 :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