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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 쌍성보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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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9월 중국 흑룡강성 쌍성보에서 한국독립군이 일본군과 벌인 전투. 쌍성보는 흑룡강성의 성도인 하얼빈에 인접한 도시로서, 이곳에는 많은 농산물이 집하되었으며 일제와 만주국를 지지하는 부호들도 모여 살았다. 때문에 일제와 만주국은 이곳을 지키기 위해 2개 부대를 주둔시키고 있었다. 한편, 지청천이 지휘하는 한국독립군으로서도 쌍성보를 공격, 다가오는 겨울에 대비하여 보급품 문제를 해결하면서 일제에게 타격을 줄 필요가 있었다. 한국독립군은 길림자위연합군과 함께 9월 20일 밤 8시경부터 쌍성보에 주둔한 만주국군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300여명의 대원들로 구성된 한국독립군은 중국인 고봉림(考鳳林)이 지휘하는 제3군의 부대와 함께 서문 쪽으로 진격하여 성문을 사이에 두고 두 시간가량의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다. 그런 가운데 서문 쪽에서부터 만주국군의 방어벽이 무너지기 시작하였고, 만주국군은 북문 쪽으로 퇴각하였다. 퇴각하던 만주국군은 매복하고 있던 연합부대에게 다시 공격을 받았다. 한국독립군은 중국인 부대와 연합하여 쌍성보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이곳에 오래 머물 수는 없었다. 쌍성보는 넓은 평지에 있는 도시였으므로 월등한 화력으로 재반격할 것이 뻔한 관동군과 만주국군을 방어하는 데 부적당한 곳이었다. 그래서 한국독립군은 쌍성보에서 남쪽으로 20km 가량 떨어진 우가둔(牛家屯)에 주둔하였다. 하지만 쌍성보에 주둔하고 있던 길림자위연합군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때마침 만주국군과 관동군의 반격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독립군은 이곳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쌍성보를 포기한 한국독립군과 길림자위연합군은 이후 부대를 다시 정돈하였다. 하지만 그들로서는 겨울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이전에 월동준비를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한국독립군과 길림자위연합군의 일부 부대는 쌍성보를 다시 공격하기로 결정하였다. 11월 17일 오후 6시 한국독립군 200여명으로 구성된 돌격대가 선봉에 서고, 나머지 연합부대는 정면, 좌측, 그리고 적의 배후에서 입체적으로 공격하였다. 이에 적은 박격포와 수류탄으로 완강히 저항하였고, 연합부대도 여기에 맞서 쌍성보의 뒷산을 점령하고 그곳에 산포를 배치하여 성 안을 향해 포격하였다. 두 시간 가까이 진행된 전투에서 전세는 연합부대에 유리하게 전개되었고, 연합부대는 성 안으로 진입하여 시가전을 벌려 관동군 1개 중대를 섬멸하였다. 그러나 패퇴한 만주군 등은 폭격기까지 동원하여 3일 만에 반격을 개시하였다. 쌍방간에 이틀 동안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지만, 우세한 장비와 막강한 화력을 집중한 관동군과 만주국군의 반격으로 22일 새벽부터 전세는 급격히 기울어져갔다. 이에 한국독립군은 쌍성보를 포기하고, 쌍성보의 동남쪽의 산악지대로 이동하여 전열을 재정비하였다. 이때까지 한국독립군과 함께 행동하던 고봉림부대는 전투과정에서 많은 인명 피해를 입었고, 도망자도 많은데다가 잔류한 부대원들의 사기도 저하되어 있었기 때문에 항전을 계속할 수 없었다. 이에 그들은 투항하여 겨울을 보낸 다음에 다시 재기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부대를 해산시켰다. 강력한 연합부대를 잃어버린 한국독립군은 분산적으로 겨울을 보내기로 하고 일단 부대를 해산하였다. 한국독립군의 지휘부는 1933년 봄에 주력부대를 중국과 소련의 변경지방으로 이동하여 활동하기로 결정하였다. - 출처 : 문화컨텐츠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