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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 윤봉길 상해의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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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은 충남 예산(禮山) 사람이다. 그는 오치서숙에서 한학을 수학하는 동안 1920년대를 풍미했던 새 방향의 민족주의 운동에 마음을 기울이게 된다. 그는 당시 민족운동의 기조적인 방향을 잘 제시하여 주었던 ≪개벽(開闢)≫등의 잡지와 〈동아일보(東亞日報)〉등이 신문을 읽고 나름대로 민족운동의 방향을 정립하여 갔다. 1927년 그는 구매조합을 조직하여 농민의 경제자립을 추구하였으며 독서회(讀書會)를 통해서 문맹퇴치에 힘썼다. 또한 1928년 부흥야학원(富興夜學院)을 설립하여 농민의 자녀를 교육시켰고 월례강연회(月例講演會) 등을 열어 신문화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농민독본(農民讀本)≫을 지어 허례허식을 지양하는 교육정신과 주체적 민족정신의 확립과 근검·절약 그리고 근로정신에 대한 그의 의식을 표출하였고,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1929년에 월진회(月進會)를 조직하였다. 그는 월진회를 통해서 농민의 단결과 민족정신의 배양, 그리고 애국사상을 고취하는 등 농촌운동을 정력적으로 전개하였으나 나라의 독립을 되찾기 전에는 일제의 압박으로 농촌운동이 성공할 수 없음을 깨닫고 1930년 3월 6일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1931년 5월 8일 상해에 도착한 그는 한인 동포 실업인 박 진(朴震)이 경영하는 중국채품공사(中國채品公司)에 취직하여 말총모자 등을 만드는 직공으로 근무하며 한인공우친목회(韓人工友親睦會)를 조직해서 회장의 일을 맡아 활동하였다. 1932년 이른 봄부터 그는 상해의 홍구(虹口) 일대에서 야채장사를 하며 일본군관계의 정보를 탐지하던 중 박 진의 소개로 임시정부 국무위원 겸 한인교포단장(韓人僑胞團長)인 백범(白凡) 김 구(金九)를 만나게 되었다. 이 당시 김 구는 임시정부와 독립운동계의 침체된 상황을 타계하기 위해서 의열투쟁을 계획하고, 그 첫 결실로서 1932년 1월 8일 한인애국단의 이봉창(李奉昌)으로 하여금 왜왕(倭王)을 폭사시키려 하였으나 불행히 성공치 못하였다. 하지만 이봉창의 의거는 중국내의 동포들과 독립운동계에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한민족의 독립투쟁에 대한 열기가 식지 않았음을 입증해 주게 되었다. 또한 윤봉길에게는 일제(日帝)에 대해 새로운 투쟁의 결의를 다지는 커다란 자극제가 되었다. 그는 김 구를 비롯한 다수의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함께 독립운동의 방략을 토론하고 의열투쟁의 기회를 열망하는 상태에서 1932년 4월 29일을 맞이하게 되었다. 상해사변으로 상해에 진주한 일본군은 4월 29일 일왕(日王)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을 일본군의 상해 점령 전승경축식과 합동으로 상해의 홍구공원(虹口公園)에서 거행할 예정이며, 상해에 있는 일본 거류민은 도시락과 수통, 그리고 입장권만을 휴대하고 참가하라는 보도를 상해일일신문(上海日日新聞)에 보도하였다. 그는 이를 살신구국할 절호의 기회로 판단하였다. 그 이유는 그날의 전승경축식에는 상해 주둔 일본군사령부의 총사령관 이하 군(軍)·정(政) 수뇌들이 그대로 이동하여 식장에 모일 것이며, 만약 그 원흉들을 일거에 제거할 수 있다면 이봉창의 동경의거보다 훨씬 더 큰 용기와 자긍심을 동포들에게 줄 수가 있을뿐더러 중국군이 막대한 희생을 내고도 이기지 못하였던 일본 침략군의 수뇌부를 폭파시키는 전과를 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살신구국의 결심을 한 그는 의거 4일 전인 1932년 4월 26일 한인애국단에 단원자격으로 김 구 단장 앞에서, '나는 적성(赤誠)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屠戮)하기로 맹세하나이다'라는 비장한 선서를 하고 최후의 준비를 서둘렀다. 그리하여 4월 27일과 28일에는 홍구공원에 가서 현지를 면밀히 조사하여 거사에 만전을 기하였고, 특히 28일에는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그곳에 머물러 준비하는 축하식장의 팻말을 보고 도륙의 대상인 일본군 사령관 시라가와(白川義則) 대장과 해군 함대 사령관 노무라(野村吉三郞)의 설자리와 그 주위에 모일 인물들까지 파악하였다. 그리하여 4월 29일 일찍 한 교포 집에서 한인애국단의 김 구 단장과 함께 아침 식사를 하고, 수통으로 위장된 폭탄 1개와 도시락으로 위장된 폭탄 1개를 김 구 단장으로부터 받아 어깨에 메고 손에 들었다. 이 준비된 폭탄은 김 구 단장의 요청으로 중국 상해 병공창(兵工廠) 창장 송식표(宋式·)가 기사(技師) 왕백수(王伯修)를 시켜 비밀리에 제조한 것으로, 병공창의 병기주임(兵器主任)이었던 김홍일(金弘壹)장군의 주선으로 김 구-윤봉길로 전달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홍구공원으로 출발하기 전에, 자신이 가진 새 시계를 김 구 단장의 헌 것과 바꾸어 갖고 의거 준비금으로 받은 돈의 나머지를 김 구 단장에게 돌려주었다. 오전 7시 50분경, 그는 공원 안으로 들어가 미리 작정해 두었던 지점에 이르러 투척할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홍구공원에는 수만의 인파가 운집하였고, 중앙의 식단(式壇)을 중심으로 하여 그 전면에는 일본 관민이 정연히 도열하였고, 그 앞에 일본 학생이 도열해 있었다. 그리고 그 좌우에는 일본 육·해군의 군대가 호위할 뿐 아니라, 그 뒤 수미터의 간격을 두고 경비원이 이중 삼중으로 경계하고 그뒤엔 일반 군중이 모여 있었다. 식단 위에는 표적물인 시라가와(白川義則) 대장과 노무라(野村吉三郞) 중장이 중앙에 자리잡았고, 그 좌우로 일제 제9사단장 우에다(植田謙吉) 중장·주중공사(駐中公使) 시게미쓰(重光葵)·거류민단장 카와바다(河端貞次), 주중(駐中) 총영사 무라이(村井倉松)·민단 간부 도모노(友野盛) 등 상해사변의 원흉들이 죽음을 기다리며 참석해 있었다. 그는 미리 보아두었던 뒷편의 군중 속에 들어가 투척장소와 시간을 맞추어 의거의 최후 준비를 하였다. 오전 11시 20분경, 기념식의 첫순서인 관병식(觀兵式)을 끝내고 이어서 두 번째 순서인 축하식 순으로 접어들어 일본 국가가 제창되었고 그것이 거의 끝날 무렵이 되었다. 드디어 11시 40분경, 운명의 시각이 되자 그는 도시락으로 된 폭탄을 땅에 놓고, 어깨에 걸매고 있던 수통으로 위장된 폭탄의 덮개를 벗겨 가죽끈이 붙은 그대로 오른손에 쥐고 왼손으로 안전핀을 빼면서 앞사람을 헤치고 2미터 가량 전진하여 단상위로 투척하였다. 그 폭탄은 그대로 노무라(野村吉三郞) 중장과 주중공사 시게미쓰(重光葵)의 면전에 명중하면서 폭발하여 일본 육군대장 시라가와(白川義則)는 전신에 24개 처의 파편을 맞아 신음하다 5월 24일 사망하였고, 제9사단장 육군총장 우에다(植田謙吉)는 다리를 절단하였으며, 해군총사령관인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는 실명하였다. 또한 주중공사 시게미쓰는 다리가 부러져 절름발이가 되었고, 거류민단장이며 상해사변의 민간 원흉인 카와바다(河端貞次)는 창자가 끊어져 즉사하였다. 이밖에도 단상에 있던 주중총영사 무라이(村井倉松)와 민단 간부인 도모노(友野盛)도 각기 중상을 입었다. 그는 의거 직후 현장에서 일제 군경에게 피체되어 상해 일본 헌병대에서 가혹한 고문과 취조를 받고 그해 5월 25일 일제 상해 파견군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받았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18일 오오사카(大阪) 육군 위수(衛戍)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가나자와 육군형무소에 이감된후 12월 19일 오전 7시 40분 교외에 있던 한 작업장에서 26발의 탄환을 맞고 순국하였다. -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