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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 6.10 만세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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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만세운동은 1926년 6월 10일 조선의 마지막 왕인 순종의 인산일을 계기로 일어난 전국적인 만세시위운동이다. 6·10만세 운동은3·1운동과 같은 만세시위를 다시 한번 전개하고자하는 천도교와 조선공산당의 지도아래 이루어졌다. 권오설을 중심으로 운동지도부로서 ‘6·10투쟁특별위원회’가 설치되어, 시위의 전국적인 확산을 위해 인산일에 서울에서는 학생이 중심되어 만세운동을 일으키고, 지방에서는 왕의 장례에 참여한 대중들을 결집하여 항일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계획하였다. 그러나 6·10만세운동에는 보다 다양한 세력들이 참가하였는데, 국외에서는 조선공산당 임시 상해부, 임시정부의 일부 세력, 임시정부의 외곽 조직인 의용대, 일본 유학생 등이 참가하였다. 국내에서는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 천도교, 조선노농총동맹, 국내 학생운동조직 들이 참가하여 각 세력 간에 깊은 연대를 이루며 만세시위를 추진했다. 만세 시위 과정에서도 각 참여 단위들은 일정하게 역할을 분담하기로 하였는데, 조선공산당 계열은 운동의 지도부를 이끌었고, 천도교는 유력한 조직기반을 바탕으로 격문 인쇄와 지방 연락을 맡았다. 여기에 조선학생과학연구회 같은 학생단체는 서울에서 만세운동을 점화 주도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6·10만세 운동에서는 다양한 이념적 편향의 구호와 주장들이 제기되었다. 교육과 관련해서는 국가경비에 의한 의무교육과 직업교육의 실시, 식민지 노예화교육의 소멸, 보통교육을 의무교육으로, 보통학교 교육용어를 조선어로, 학생집회의 자유보장, 대학은 조선인 중심으로, 일본인 교원 배척, 조선인 교육은 조선인 스스로 등이 주장되었다. 그러나 6·10만세운동은 일제의 철저한 탄압으로 서울에서 학생중심으로 만세시위가 일어났을 뿐이고 지역에서는 산발적인 시위 이외에 크게 일어나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국내외 민족운동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의 주장이나 지역을 초월하여 여러 운동 세력의 연합에 의해 반일민족운동을 전개하려 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특히 학생운동의 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3·1운동 이후 학생운동은 점차 조직화되어 조선학생회, 조선학생대회, 조선학생과학연구회 등의 독자적 학생운동 조직을 만들고 있었다. 이들 학생운동 조직들이 6·10만세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이후 학생은 독자적인 운동 주체로 부상하게 되어, 광주학생운동을 이끌어 나갈 수 있었다. - 출처 : 국가기록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