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page


120page

·1920· 청산리 전투
120page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홍범도가 지휘하는 연합부대와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군이 일본군과 청산리에서 벌인 전투. 청산리는 조선인들이 많이 모여 사는 북간도의 연길과 용정에서 백두산으로 가는 길목에 있어 주위의 산세가 험하고 복잡하였다. 청산리 계곡에는 200여 호 정도의 조선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많은 주민들은 대종교 신도였으며, 이 계통에서 운영하는 청일학교·의합천일학교 등이 있었다. 따라서 청산리는 독립군이 운집하고 활동하기에 적당한 곳이었다. 한편, 일본군은 1920년 6월 봉오동전투에서 크게 패배한 후 이를 만회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당시 동만주지방의 한인사회에서는 이미 일본군의 출동이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였다. 이에 따라 홍범도의 연합부대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은 월등한 군사력을 갖춘 일본군의 공격을 피하기에는 지형이 험준하지만 독립군들에게는 익숙한 곳이었던 백두산 일대가 적당하다고 보고, 세력을 보존하기 위해 병력을 이동하기로 결정하였다. 청산리전투는 이처럼 독립군이 이동하는 중에 추격해오는 일본군과 청산리에서 격돌한 전투였다. 청산리전투의 첫 싸움은 청산리에서 계곡을 따라 10여리 올라간 백운평에서 10월 21일 아침 야마다(山田) 연대와 김좌진의 부대 사이에 있었다. 김좌진은 지형조건을 십분 활용하기로 하고, 비전투원으로 구성된 제1제대는 후방에, 이범석이 지휘하는 제2제대는 최전선에 배치하고 일본군 추격대가 매복지에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 이 사실을 모르는 90여명의 야스가와의 전위부대는 독립군이 매복해 있는 곳까지 다가왔고, 이때 300여명의 독립군이 일본군을 향해 집중 사격하였다. 이후 중무장한 야마다 연대의 주력부대가 몇 차례 돌격을 시도하였으나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고 은폐사격을 하는 독립군을 이길 수 없었다. 결국 야마다연대는 100여명의 병사를 잃은 채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홍범도가 이끄는 연합부대도 백운평전투 다음 날인 22일 오전 일본군과 맞닥뜨렸다. 천리봉에 지휘부를 설치한 홍범도는 일본군의 계략을 간파하고 독립군 부대를 둘로 나누어 매복하고 있다가 남북 양측에서 나타나는 일본군을 공격하여 400여명을 사살하였다. 백운평전투와 완루구전투를 마친 김좌진과 홍범도 부대는 다시 어랑촌에서 일본군과 조우하였다. 싸움은 22일 오전 9시 300여명의 김좌진 부대와 아즈마 부대의 일부인 기병연대 사이에 시작되어 저녁 7시까지 계속되었다. 처음 전투에서는 김좌진 부대가 밀렸으나 홍범도 연합부대가 천리봉 서북쪽으로부터 싸움에 가세하면서 대규모 공방전이 벌어졌다. 1,700여명의 독립군과 월등한 화력을 갖춘 1000여명의 일본군 사이에 치열한 싸움에서 일본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고 후퇴하였으며, 독립군은 이 틈을 이용하여 소분대로 나누어 이동하였다. 이후에도 23일의 맹개골전투과 만록구전투, 24일과 25일의 쉬거우전투와 천보산전투, 25일과 26일에 걸쳐 있었던 고동하전투에서 독립군은 승리를 거두고 최대의 전과를 올렸다. - 출처 : 문화컨텐츠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