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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 봉오동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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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6월 7일 중국 길림성 봉오동 골짜기에서 홍범도가 이끄는 독립군 연합부대와 야스가와(安川) 소좌가 이끄는 일본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 만주지방에서는 3·1운동 이후 고조되던 항일 열기를 이어받아 무력으로 일제와 싸우려는 분위기가 확산되어갔다. 이때 동만주지방에서 무력 투쟁을 주도한 사람은 홍범도로, 그는 대한독립군을 이끌며 안무(安武)가 이끄는 국민회군(國民會軍), 최진동(崔振東)이 지휘하는 군무도독부군(軍務都督府軍)과 연합하여 활동하였다. 봉오동전투도 이러한 와중에서 일어난 싸움이었다. 봉오동은 원래 황무지였는데, 1908년 최진동이 중국의 지방관청으로부터 이곳의 토지를 사들여 개간하면서부터 점차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새로 형성된 한인 마을은 최진동이 지휘하는 독립군의 활동 기반이었으며, 1920년 당시 동만주지방에서 활동하는 독립군의 중심지로 바뀌었다. 봉오동은 남쪽으로는 삼둔자 등 독립군의 활동거점과 연계되어 있었고, 서북쪽으로는 약 40리 떨어진 곳에 북로군정서의 소재지인 서대파가 있었으며, 서남쪽으로 약 16리 떨어진 곳에 홍범도와 연합한 신민단의 근거지인 석현이 있었다. 또한 북쪽으로 약 40리 떨어진 곳에 광복단의 근거지였던 대감자가 있었다. 6월 6일 밤 10시, 한 독립군 부대가 함경북도 강양동의 일본군 초소를 공격한 독립군을 추격하기 위해 두만강을 건너온 일본군 부대를 삼둔자(三屯子) 서북방 봉화리(일명 범진령)에서 기습하였다. 이것이 봉오동전투의 서곡인 삼둔자전투이다. 이에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제19사단은 야스가와 소좌를 지휘자로 하여 월강추격대를 만들어 독립군을 공격하도록 지시하였다. 월강추격대는 즉각 두만강을 건너 독립군을 추격하다 남봉오동에 도착하였다. 당시 홍범도 등의 독립군 지휘관들은 일본군의 추격을 예상하고 봉오동 일대에서 격전을 벌일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다. 6월 7일 새벽, 홍범도의 지시를 받은 이화일(李化日)의 독립군은 남봉오동에서 일본군 추격대를 공격하며 마치 일본군의 반격으로 퇴각하는 것처럼 속였다. 당시 독립군은 홍범도의 통일적인 지휘 아래 마을 주민을 모두 대피시키고, 북봉오동의 서산에 홍범도의 지휘부가, 동산에 최진동의 부대가, 남산에 신민단의 부대가 각각 매복하고 있었다. 오후 1시경 하촌과 중촌을 닥치는 대로 유린한 일본군은 척후병을 보내 상촌으로 진입해 들어왔지만, 신민단의 부대는 이들을 그대로 통과시켜 주었다. 그러자 주력부대도 아무런 경계 없이 포위망 속 깊숙이 들어왔다. 이때 홍범도의 신호탄을 시작으로 각처에 매복해 있던 독립군은 일본군을 향해 일제히 사격하여 수많은 사상을 발생시켰다. 정신없이 당하고 있던 일본군은 봉오동 일대에 갑자기 밀어닥친 시커먼 먹구름과 쏟아지는 폭우를 이용하여 간신히 포위망을 빠져나와 철수하였다. 이 전투에서 독립군은 일본군 150여명을 살상한 것으로 보고 있다. - 출처 : 문화컨텐츠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