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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옥은 서울 사람이다. 20세때 동흥야학교(東興夜學校)를 설립하여 교육운동을 전개하면서 이전부터 종사하던 철물공장을 설립하여 이윤을 분배하였던 그는 또 이종소(李鍾韶)·임용호(任龍鎬)·손정도(孫貞道) 등과 사회계몽·민족독립에 대한 일을 의논하고 실행하였다. 그리하여 백영사(白英社)를 조직하고 금주·단연운동을 크게 전개하며 말총모자공장을 설치하고 국산모자의 생산·보급에 힘쓰기도 하였다. 그는 3·1독립운동이 일어남과 함께 윤익중(尹益重)·신화수(申華秀)·정설교(鄭卨敎) 등 동지들과 함께 비밀결사인 혁신단(革新團)을 조직하고 기관지 〈혁신공보(革新公報)〉를 발행·배포하여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그리고 1920년 봄에는 만주에서 들어온 군정서원(軍政署員) 김동순(金東淳)과 만나 암살단을 조직하여 적 기관을 파괴하고 요인을 암살하는 등의 직접 행동으로 독립운동을 타개해 나갈 것을 계획하였다. 그해 8월에는 미국 의원단 일행이 서울에 들어오는 기회를 이용하여 한우석(韓禹錫) 등과 함께 의원단이 남대문역(지금의 서울역)에 하차하기를 기다려 시위와 총격전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의원단의 서울 도착 전날에 일부 동지들이 피체됨에 따라 실패로 돌아갔다. 그는 일제 경찰의 수사망을 피하여 그해 10월 중국 상해로 망명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김구(金九)·이시영(李始榮)·조소앙(趙素昻) 등 임시정부 요인들의 지도와 소개로 중국의 지사들과 교유하면서 조국독립을 위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1921년 일시 귀국하여 군자금 모집과 정탐의 임무를 수행하였고, 다시 1922년 겨울 의열단원으로 폭탄·권총·실탄 등의 무기를 휴대하고 동지 안홍한(安弘翰)·오복영(吳福泳) 등과 함께 서울에 잠입하였다. 이때 그는 의열단장 김원봉(金元鳳)을 통하여 서울에 있던 의열단원 김한(金翰)과의 연락 협력을 당부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동지들에게 연락하며 거사의 기회를 노리다가 이듬해 1월 12일 밤 종료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였으며, 이후 일경을 피해 10여일간 은신하다가 1월 22일 일본 경찰과 교전 끝에 장렬하게 순국하였다. 순국 후 1924년 상해 임시정부 외교부장 조소앙(趙素昻)은 전(傳)을 지어 간행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츨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