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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와 노령에서 독립군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일본군 장교로 복무하던 중 1919년 동경에서 2·8독립선언이 있자 민족적 책무를 자각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는 마침내 1919년 6월 6일 이청천과 함께 만주로의 망명을 단행하였다. 만주로 망명한 후 신의주 대안 안동현(安東縣)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대한독립청년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19년 8월 총재인 안병찬(安秉瓚)의 체포로 인하여 대한독립청년단에서의 활동도 크게 위축되었다. 이에 김경천은 보다 효율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서간도 유하현(柳河縣)에 있는 신흥무관학교를 찾아가 교관으로 활동하였다. 그후 대일무장투쟁에 필요한 무기구입을 위해 북간도를 경유하여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하였으나 그곳도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으로 인하여 일본군의 감시와 조선인 체포로 인하여 활동을 전개하기 어려웠다. 이에 산림지대인 수청지역으로 이동하여 산림속에 일단 피신하였다. 그런데 당시 수청지역도 일본의 조정을 받는 중국계 마적들이 수시로 출몰하여 한인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이에 곤궁에 처해있는 재러동포들을 구하기 위하여 의용군을 모집, 마적 소탕에 적극 나서게 되었다. 즉 그는 처음에는 수청지역 창해청년단의 총사령관으로 활동하면서 마적소탕에 전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결국 1920년 수청지역에서의 마적 퇴치활동으로 시베리아지역에서 그 명성을 크게 얻었고, "김장군"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마적토벌에 성공한 후 그는 수청지역을 중심으로 군정을 단행하였다. 그리하여 만일 중국인이나 러시아인도 관할구역을 벗어나 타지역으로 이동하고자 할 때에는 그가 발행하는 증명서를 소지하여야만 하였다. 아울러 재러동포들의 안정된 삶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하여 민정(民政)도 단행하였다. 1921년 봄 연해주 수청군 인접지역인 올가군에서 300여명에 달하는 통합빨치산 부대가 조직되자 김경천은 그 지도자가 되었다. 그리하여 수청의 아누치노(도비허)구역에 있는 백군 까벨부대와 전투를 전개하였다. 또한 까르뚜크 마을의 치열한 전투에도 참전하였다. 수청 다우지미에서 활동하고 있던 그는 1921년 초 수청 고려의병대에 초빙되어 군대의 총책임자로 활동하였다. 수청의병대의 지도자가 된 그는 계속해서 수청지역의 마적 퇴치에 노력하였다. 1921년 8월 수청의병대는 러시아 참모부의 지령에 따라 모두 도비허로 이동하였다. 그는 9월 러시아 유격대 셉첸꼬 부대의 제안에 따라 의병대의 일부를 올가항에 보내는 한편 나머지 대원들은 아누치노로 이동시켰다. 특히 그의부대는 동포들의 요구에 따라 마적들을 방비하기 위하여 수청의 뜨레치푸진과 수주허에 주둔하였다. 10월 김경천부대는 러시아 적군과 연합하여 수청에 주둔한 백군을 공격하여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패하여 일본군과 백군의 추격을 받게되자 그는 기병을 데리고 이만 지방으로 이동하였다. 이만으로 이동한 김경천 부대는 1922년 정월 이만에서 백군과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적군의 사령관이 백군에 항복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수청의병대와 더불어 러시아 적군도 함께 지휘하여 이만을 점령하였다. 이어 그는 1922년 3월 러시아 적군과 연합하여 약골리가를 공격하였다. 이에 러시아 백군은 우수리스크 쪽으로 쫓겨났다. 이어 백군이 한반도쪽으로 퇴각할 듯 보이자 그는 이들을 추격하기 위하여 일본군의 경계선을 뚫고 추풍지역으로 돌격하였다. 그가 이처럼 승리를 거두게 되자 1922년 7월 연해주의 혁명군사위원회는 그를 뽀시에트 군사구역 조선부대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1922년 9월 그는 뽀시에트로 이동 중 상부 시지미촌에서 백군 패잔병들과 전투를 전개하였다. 수청의병대는 그의 지휘아래 기마공격을 강행하여 승리하였다. 1922년 러시아와 중국 국경지방에 있는 단체는 각 단의 통일을 도모하는 동시에 장정의 모집과 무기의 수집에 힘써 10월 일본군의 철퇴가 완료되기 직전에 고려혁명군을 조직하였다. 고려혁명군 총재는 이중집(李仲執)이며 소재지는 추풍(秋風)이었는데, 고려혁명군 동부사령관을 그가 담당하였으며, 본부는 그의 근거지인 수청에 두었다. 1922년 일본군이 시베리아에서 철수하자 12월 말, '조선인 유격연합대 해산 및 국민전쟁 참가자 귀가'에 대한 우보레비츠 총사령의 명령이 내려왔다. 적군은 지금까지의 동맹군인 한인독립군에 대해 무장해제를 요구하였다. 그는 실의에 빠져 있었는데, 이러한 때에 상해(上海)에서 독립운동단체들이 모두 모여 재기를 모색한다는 소문이 들렸다. 이에 그는 1923년 2월 상해에 가서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하였다. 그러나 이 회의에 실망한 그는 1923년 4월 노령 블라디보스톡으로 다시 돌아와서 구로지코 부근에 무관학교의 설립을 추진하여 갔다. 또한 그는 1924년 3월에는 한족군인구락부를 조직하여 본부를 블라디보스톡에, 그리고 지부는 니콜리스크에 두는 등,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활동도 러시아당국의 한인정책과 노령출신 2세들과의 갈등으로 점점 쇠퇴하고 말았다. 김경천은 그후 1930년대 전반기까지는 주로 블라디보스톡에서 한족군인구락부라는 것을 조직하여 산산이 흩어진 항일역량을 다시 수습해 보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실의의 나날을 보내다가 블라디보스톡에 있는 극동고려사범대학에서 군사학과 일본어를 가르쳤다. 그후 소련정부에 의해 옥고를 치르고 강제 노동수용소에 수감되는 등 고초를 겪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8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