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龍雲堂 萬海 大禪師碑(용운당 만해 대선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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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용운당 대선사비 한국말년에 중북교를 도시로 끄러내어 개중화하고 아울러 쇄망하는 국운을 만회라여 민조사회를 실현하려는 큰지도자가 있었으니 그가 곧 선과 교를 능총하고 진과 속을 쌍융한 용운당 대선사이다. 선사는 서력 18879년 고종16년 기유 음 7월 12일에 충청도 홍주목 주북면 옥동 현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 오관리에서 충훈부도사 한응준의 차남으로 났으니 본관은 청주요 모는 창성방씨다. 누대의 사족으로 조 영우는 훈련원 첨정이고 증조 광후는 지중추부사였다. 사의 속명은 유천 자는 정옥이니 어려서부터 총명이 과인하여 재중으로 유명하였고 향숙에서 한문을 배우다가 18세에 숙사가 되어 동몽을 가르치면서 탐관오리의 침분에 시달리는 민중을 구출하여는 생각으로 동학당운동에 가담하였다. 24세에는 일본의 침략이 점점 심해지매 자유독립을 혁고히 하려는 뜻을 품고 결연이 집을 떠나 강원도 인제군 백담사에서 연곡 화상에게 득도하니 계명이 봉완이요 후에 건봉사의 만화선사의 법을 이어 법호를 용운이라하고 뒤에 아호를 만해라하다. 출가한 지 미구에 속가의 부와 형은 창의대장 민종식과 함께 정산에서 의병을 이르키어 염포와 홍주를 점거하더니 마침내 중과부적으로 패적하다. 1910년 경술에 원종종무원의 일간부가 일본의 조동종과 연합조약을 맺으므로 사는 영호 ?호 진응 혜찬 그몽 병인등 제사와 더불어 임제종을 주창하여 이를 반대하였다. 조국이 일본에 병합되매 내외의 정세를 살피기위하여 남북만주로 만유하다가 까막눈 이들의 오해로 해삼위 통화현에서 불의의 횡액을 당하였으나 일생에 그를 발설하지 아니하였다. 35세에는 통도사에서 대장경을 열람하면서 불교대전을 편술하였고 36세에는 설악산 오세암에 안거하는데 臘(납)월 8일에 동사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