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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의 모든 권익을 분해코저 하다가 마침내 로일전쟁까지 초래하는가 하면 그 결과 4238년 에는 밀제의 위협강박아래 조인된 저 소위 을사보호조약으로 주권이 거의 박탈되니 이동안 선생께서는 불분고신하고 전국토림의 동지들과 더불어 복수토역과 항일구국을 위해 13도 유생 소두가 되시고 복각상소하시기 십수차에 걸쳤으며 때로는 역도처단의 과감한 행동도 기도하셨다. 그러나 대세는 이미 기울어 일제헌병의 추적이 드디어 선생을 체포 투옥하고 온갖 고문과 사술로 선생의 위국충절을 꺾고저 하였다. 이에 선생께서는 피인된 몸이지만 백절불굴의 기백으로 끝끝내 대의를 굽히시지 않고 육삭동안이나 심혹한 고초를 겪으시다가 마침내 별실 천씨의 단성으로 드리는 사식조차 물리치고 절립단음하시기 14일간에 누차 토혈한 나머지 4239년 병오 5월 10일에 장절하게도 향년 55세의 생애를 손수 목졸라 자진순국하시었다. 선생이 순국하신 다음 그 버선목에서 발견된 유서에는 영식 응주에게 부탁하시되 "내 국권을 회복못한채 죽게 됨이 천추의 한이라. 오로지 슬퍼말고 네 아비의 뜻을 계승해야만 진실로 내 이들이라" = "鳴呼死矣...."고 밝히셨다. 이같이 하여 남기신 선생의 유훈이 그 자손을 이끌어 기미독립운동에 남달리 공헌토록 하셨음은 물론이요 온 겨레를 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