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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 삼일만세운동은 이 겨레가 조국의 독립자존을 세계만방에 선포한 청사에 빛나는 쾌거였다. 경술국치후 십개성상 일제의 잔악한 총칼에 짓밟힌 이 강토가 초토화되매 온 겨레의 울분은 하늘에 닿았다. 국망의 통한을 가슴에 안고 수많은 애국열사들이 국내외에서 국권회복의 굳은 의지로 항일투쟁을 계속하던 중 마침 고종황제의 33인이 역사적인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자 수만군중들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1대시위를 감행했으니 어찌 장거가 아니랴. 이 민족독립운동은 겨레의 애국심을 용동시키는 도화선이 되어 그 거센 물결은 마침내 이 나라 방방곡곡에 요원의 불길처럼 퍼졌다. 우리 고장 영동의 만세운동은 이마을 주곡리에서 시원되어 신속하고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기미년 3월1일 전 승지인 이마을 원로 송암 정태헌의 집전으로 주곡동민일동이 동구밖 광장에 모여 광무제추모제례를 거행 망국의 한을 통분해하고 삼가 국왕의 서거를 애도하니 이마을 열혈청년들의 끓는 가슴에는 저마다 국권쟁취의 굳은 의지가 용솟음쳤다. 이들 중 진작부터 은밀히 거사의지를 결집한 20대 청년들은 이에 크게 감발되어 감연히 떨치고 일어나 거군적 독립만세운동을 결행하였으니 그들이 곧 김태규, 장인득, 한광교, 정성백, 한의교, 박성하, 정우문의 7지사였다. 거사장소와 날짜를 영동의 장날로 결정한 7지사는 드디어 3월 4일 읍내 아랫장터 솟전안집에서 회동 주모 박명월이 마련한 주안으로 일배를 나누며 최후의 맹약을 굳게 다진 뒤 결연히 가두로 진출하여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소리높이 외쳐나가매 수많은 장꾼과 읍민이 대열에 합세하니 시가는 순식간에 군중의 물결로 뒤덮였다. 시위군중은 점차 홍수처럼 불어나 무려 3천여명의 시위대열이 가로를 누비며 만세를 외치니 격앙된 함성은 하늘을 찔렀고 드높은 기세는 천지를 뒤덮었다. 노도같은 군중의 물결에 경악한 왜경들이 무자비하게 휘두르는 총검에 6명의 시위군중이 무참히 희생되고 8명이 중상을 입는 참상에도 7지사의 충용한 열혈단심은 식을 줄을 몰랐다. 왜경의 혹심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끝내 저항하다 체포되어 공주감옥에 수감되니 그들의 고통이 어떠하였으랴. 극심한 옥고에도 유관순열사의 옥중투쟁에 적극 가세하여 항일의지를 굽히지 않았으니 장하도다. 그 높은 기개여 빛나도다. 그 굳은 절의여 이제 가신 님의 숭고한 애국심을 길이 경모하고 후손들에게 영세불망의 귀감으로 삼고자 우리 주곡리 동민일동 출향인사 그리고 그 높은 뜻을 기리고자 하는 유지들의 뜻을 함께 모아 여기 비를 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