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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양학교설립 일백주년 기념비 비봉산 정기 뿜어서 이룩한 이땅을 유유히 흐르는 금강수 맑은 물이 호위하듯 감싸안은 바로 이곳에 조양학교 설립되니 융희4년이라 서기로는 1910년. 금년이 바로 일백주년이 되는 해다. 죽림서당과 조양서당이 합쳐서 조양학교가 설립되었다. 학교이름 조양은 봉명산 동쪽 조양에 봉황이 울면 성인이 난다는 고사에 기인했다. 조양이란 지명은 신라때부터이며 양산팔경은 수려한 이름난 명승지이다. 강선대 봉황대 비봉산 여의정 영국사 용암 자풍당 함벽정이다. 이 유서깊은 고장에 조양학교가 설립되니 초대 교장에 호고재 이상영이고 손자인 금은 이명주가 일했다. 조양학교 설립에 애쓴 분들은 이원기 이상덕 이상순 이상윤 이승연 이학연 이하연 이채연 이범주 성두식 장남흠 윤용배 윤선남 이학경 이승건 이항식 박승봉 전규한 전신조 정학종등이다. 이외에도 많은 분들이 있으나 다 기록하지 못한다. 인천이씨 밀양박씨 창령성씨 함양여씨 하동정씨 옥천전씨등 18개 문중에 이룩한 학교이다. 학교재산으로 교전의 200여두락이나 되었다. 자풍서당, 호계서당, 봉곡서당등의 재산으 기증받고 서당의 학생들을 모아서 이룩한 학교이다. 당시 영동군수 임연상은 12개면장을 동원하여 조양학교를 폐하고 재산을 영동으로 옮기려니 조양학교 설립자인 이명주등 학교의 간부들은 조양학교를 수호하기 위하여 투쟁을 전개하였다. 중앙의 학부와 내부까지도 논의되었고 1년여의 항쟁끝에 임연상군수가 방침을 철회하고 사과하므로써 싸움은 끝이나고 조양학교는 유지되었다. 젊은 이명주등이 군수와 싸워서 승리할수 있었던것은 18개 문중의 여러분들이 단결과 호고재 이상구의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일제하 1921년 사립 조양학교를 폐하고 조양공립보통학교로 개칭하였고 다시 양산보통학교로 다시 양산심상소학교로 다시 조양국민학교로 개칭되었고 조국광복후 다시 조양초등학교로 개칭되어 현재에 이르렀다. 그동안 많은 인재를 배출한 전통있는 명문교이다. 당시 학교 교시는 도덕이었으니 인의예지신충효의 교육정신으로 2000년동안 교과서의 뜻이기도하다. 오산 이동호씨의 간청으로 사양하지 못하여 이와같이 서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