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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강 이용직은 백성에 대한 수탈과 탐학이 심하여 파직되어 유배된다. 처음에는 경상도 칠곡에서 유배살이했다. 나중에는 충북 영동 밀골로 유배지를 옮겼다. 그리고 영동군 수석리가 그가 머문 마지막 유배지이다. 이곳에 유배와 있으면서도 반성하지 않고 백성을 학대하고 수탈하였다. 또 동학농민봉기를 전후해서 이 지역 동학도로 부터 여러차례 습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가 죽자 왕은 그에게 왕족이 타는 상여와 유명한 풍수관을 내려보냈다. 풍수관이 택한 명당 터는 유배 온 충북 영동을 넘어 경북 김천으로 나왔다. 그래서 상여행렬은 추풍령을 넘어 김천으로 향했다. 왕족상여 행렬이라 장중하고 규모도 컸다. 그런데 상여는 더 이 상 추풍령을 넘지 못했다. 김천 백성들이 막아섰기 때문이다. 그의 탐학을 김천 백성들도 알고 탐관오리를 김천 땅에 들일 수 없다며 내쳤다. 하는 수 없이 상여행렬은 되돌아 그개 유배 온 영동 용산면으로 되돌아 왔다. 그런데 또 문제가 생겼다. 이용직 밑에서 갖은 학대와 고통을 당한 종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통상 왕과 왕족이 탄 상여는 부속들과 함께 매장지에서 불태우는 것이 상례인데, 종들이 이용직이 탄 상여를 빼앗아가 가 벼렸다고 한다. 그 덕에 좀처럼 보기 어려운 왕족상여가 살아남아 오늘날까지 전하게 되었다고 한다. 출처 : 블로그 '동학농민전쟁 속 왕족상역 살아남은 까닭은' https://jang0355.blog.me/2213071054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