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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합방이 발표되고 말았다. 이에 분을 참지 못한 선생은 며칠을 통곡하더니 9월 11일(음 8월 8일)에 동지들과 역말(부용리)에서 국권회복의 밀회를 하던 중 창의(昌義)를 주장하다가 망국의 한을 참지 못하고 「나라 잃은 백성이 살아서 무엇하겠는가?」하며 머리를 벽에다 박고 졸도 급서하였다. 김평근(金平根) 선생은 자가 운칠(云七), 호는 송재(松齋)이며 위 김용호 선생의 제4자로 1870년에 태어났다. 선생은 천품이 영민하고 정의감이 강하더니 아버지의 애국정신을 본받아 정미(丁未:1907) 의병 때 분연히 항일 의병장 장운식(長雲植) 진으로 들어갔다. 지대장으로 추대받은 선생은 민한식(閔漢植) 등 10여명의 동지들과 옥천을 본거지로 하여 충북 남부와 전북 북부 일대를 누비며 일본인 타도, 친일인사 규탄, 우편취급소 및 세무서 방화, 통신시설 파괴, 의병활동자금 조달 등의 항일활동을 하였다. 그간 금산.무주 등지에서 일본 수비대와 여러번 대치할번 했으나 번번이 주민들의 제보로 무사하다가 1909년 3월 9일에 체포 당했다. 이때 일본 경찰은 선생의 체포를 「서장 이하 고심 열성의 성과」라 극찬하고, 선생은 「왜인들의 재판은 받을 수 없다」고 항거하므로 일인 검사가 항소(抗訴)했다 하니, 그 당시 선생의 항쟁의 강렬하였음과 그 기개의 대단하였음을 짐작할만 하다. 선생은 징역 5년을 선고 받고 영천(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는데, 이듬해 나라를 빼앗기고 그 아버지마저 순국하자 불효 불충을 한탄하며 수일간 단식 통곡 하였다 한다. 일본제국은 그 3년 후인 1913년에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선생의 고향 마을 이름「지계리」마저 「각계리」로 바꾸어 버렸다. 복역을 마친 선생은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하여 이름을 현권(顯權)이라 바꾸고 김천 봉산(鳳山)에 은거하며, 천도구국단(天道救國團)의 일원으로 활약하다가, 119년 3.1운동 때에는 김천과 상주 시위에 참가하였다. 옥고에서 온 건강 악화로 고향에 돌아와 오래 신음하다가 1924년 음 1월 8일에 세상을 뜨니 그 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