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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이 추서된 김평근 선생의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내용이다. 김평근 선생은, 충북 영동(永同) 사람이다. 일제는 1904년 한국 침략의 경쟁국인 러시아 군대를 기습공격하여 러일전쟁을 도발하고 한일의정서를 강제하여 한국을 그들의 전쟁기지로 삼았다. 그런 다음 같은 해 8월에는 한일협약으로 고문정치를 강요하여 재정권과 외교권을 장악하여 갔다. 이어 1905년 화폐개혁을 통해 경제를 파탄으로 몰아넣더니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내정을 간섭하였다. 1907년에는 정미7조약으로 대한제국의 내정을 완전 장악한 후 군대마저 강제 해산하였다. 이제 대한제국은 자주권을 잃어 사실상 국권을 상실한 것과 같았다. 이와 같이 국망(國亡)의 조짐이 심화되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일제와 항쟁하였다. 대한제국군 출신의 해산 군인을 비롯하여 새로이 많은 인사들이 거의하여 의병전쟁을 전민족적 운동으로 발전시켜 갔다. 이와 같은 시기에 김평근은 분연히 일어나 1907년에 거의한 장운식(張雲植)의진에 참여하여 대일항전을 전개하였다. 그는 의진 내에서 주로 군수금품 모집을 담당하여 민한식(閔漢植), 임해준(任海俊), 곽준희(郭俊熙) 등의 동지들과 함께 충북 옥천(沃川), 전북 금산(錦山) 등지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군자금을 수합하는 등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그는 1909년 3월 일경에 붙잡혀 6월 1일 경성공소원에서 징역 5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