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page


111page

서울에 체재중 기미년 2월에 민족대표의 한분인 정춘수로부터 독립선언서 수십매를 받고 고향에 도라와 영동부근의 동지를 규함하고 다시 선언서를 옥천 이원 무주 금산등지에 배포하여 이 날의 거사를 서둘렀던것이다(독립운동사 제3권 94면 기재). 때마침 그해 3월 1일에 독립운동이 전개되자 절호의 시기로 분연궐기하여 학산 산양면민의 선두에서 항일구국하자고 창의하셨다. 이해 3월 3일 하오 4시경 학산면 금산리 시장에서 약300여명의 군중이 이에 호응하여 선생의 지휘하에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소리높이 외치면서 시위운동을 전개하였고 같은 날 밤8시경 나는 군산에서 온 국민대표 양봉식이다하며 군중을 이끌고 면사무소에 돌진하여 일제의 침략거점을 파괴하였다(독립운동사 제5권 1123,4,5면 기재). 선생은 이로인하여 왜경에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으로 구혈기절함이 비일비재하였으며 3년간 옥고중에도 초지일관 항일투쟁으로 시종하였다. 선생의 옥중작품으로 결사포고문이 있으나 시구 2수만을 소개한다. 일편단심 지사불면 단의복지 표리일색. 이 위대한 애국충서을 영원히 기리고 후진들의 귀감이 되도록 선생의 묘전에 이 비를 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