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page


10page

3.1독립만세운동기념탑 병서 3.1독립운동은 우리 민족 수난기에 빼앗긴 우리나라의 주권을 되 찾기 위한 위대한 민족항일운동이었다. 영동 양산의 면민들도 민족의 대 역사에 호응하여 동참하였으니 이제 여기에 그 기록을 남김은 충절의 고장 영동 양산을 내외에 널리 알리고 후손들에게도 내 고장 선열들의 숭고한 모습을 전하기 위함이다. 1919년 2월 충정공 민영환선생과 함께 을사보호조약의 반대 상소에 앞장섰던 승정원 승지 이기영선생과 공의 서랑 이봉인공은 빙부의 뜻을 받아 항일동지를 규합하여 서울의 파고다공원에서 열린 3.1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그해 3월 20일 고향인 가곡리에 내려오신 공은 대대로 이 고장에 터 잡아 살아 온 인천이씨의 문중회의를 소집하여 양산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청년단이 조직되고 치밀한 계획끝에 거사일은 사람이 많이 모일수 있는 이웃 학산의 장날인 3월 30일로 정하였으며 청년들은 그날까지 태극기를 만들어 면민들과 장꾼들에게 나누어 주기로 하였다. 이때 이 거사계획을 눈치챈 보통학교 학생 이흥연과 이성주는 성급한 마음에 흑판에다 "대한독립만세"라고 크게 써서 도로가에 세워놓고 시위를 벌이다 왜경에게 체포되는 일을 당하기도 하였다. 약속된 3월 30일 청년단장 이관연은 단원들과 함께 면민들을 선동 격려하며 학산 장터로 진출하였고 때 맞추어 영동-무주간 도로공사에 동원되었던 부역꾼들이 합세하니 삽시간에 시위군중은 수백명으로 늘어났으며 이들은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의 함성과 함께 돌을 던지며 학산주재소를 습격하였다. 당시에 도적 왜경들도 그 위세에 눌려 태극기를 들고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고 전해지며 그 와중에 구속되었던 이성주와 이흥연도 구출되었다. 그러나 왜군의 지원병이 동원되자 군중은 흩어지고 청년단장 이관연과 단원 이기주 이현주등은 피신 할수 있었으나 여러 명의 청년단원과 시위군중은 체포되고 말았다. 고향의 어른들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당시 이 고장의 청년은 너나없이 만세운동에 동참하지 아니한 사람이 없었다고 하는데 그들가운데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몇분은 광복과 함께 기록에 의하여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기도 하였으나 총칼의 억압으로부터 도피하여 고통의 나날을 보냈던 더 많은 사람들은 그 이름조차 전해지지 않아 후손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였다. 이에 당시의 거사에 동참했던 모든 분들의 정령을 추모하고 현양하며 매년 3.1절 기념행사를 유족과 함께 제향하자는 뜻도 더불어 이 자리에 함께 올렸다. 이 탑이 서기까지에는 가곡리 출신 준봉 이경주와 충북도지사와 내무부장관을 역임한 인산 이동호의 제안과 요청으로 발족된 양산3.1독립운동기념탑 건립추진위원회의 노력과 그리고 충청북도와 영동군의 지원비 9천6백만원과 추진위원및 유족들의 헌성금 4천2백9십만원을 합친 1억3천8백9십만원의 건립자금으로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