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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십칠첩 등의 서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상황을 파악한 것으로 사료된다. 3.1독립만세 운동의 연장으로 민족지도자들이 연합하여 결성한 신간회(1927)가 전국으로 확산될 때 신간회 강릉지회 7인의 설치준비위원(조선일보 1927.11.9)으로 창립에 기여하였으며 제1회 간사회(1927.12.3)에서 선전부 총무간사로 피선되고 즉석에서 회비로 일금 3원을 자진출연(조선일보 1927.12.8)하였다. 총무간사회(1929.1.27)에서 재정부 총무간사(동아일보 1929.2.4)로 피선되었고 정기총회(1930.12.20.)에서 개선된 집행위원(조선일보, 동아일보 1930.12.25)에 피선되었으며 일본의 탄압으로 신간회 중앙본부가 해산되어 강릉지회도 3년여후 해산시까지 민족의 애국애족정신을 함양 고취하는데 전력하였다.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하고자 가족과 함께 전전하여 삼척군 삼척읍 읍중리로 이주하여 계속 항일계몽운동에 전념하니 일본경찰의 감시자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삼척경찰서의 조사를 받은 신분장지문대장(1943.11.8)이 입증하여 국권회복과 자주독립을 위하여 신명을 바친것이다. 조국이 광복된 후 3.1절과 광복절 기념식에는 성덕, 강릉초등학교 등에서 애국정신 선양에 진력하였음을 지금도 당시 강연을 듣던 인사들은 회고하기도 한다. 이에 대한민국정부에서 건국사업에 이바지 한바 크므로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선조의 위업을 돼새기면서 후세들은 옷깃을 여미고 부끄러움 없는 삶을 살아갈 것과 어떤 역경과 고행이 따른다 하여도 선조의 업적과 덕행을 본받을 것을 다짐하면서 후손으로 깊은 감사의 마음과 자긍심을 가질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