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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인규는 강원도 강릉(江陵) 출신으로서 아들 권종해(權鍾海) 손자 권기수(權基洙) 3대가 모두 의병운동에 투신하여 의병운동사상 두드러지는 집안 중 하나를 장식하였다. 1895년 일제의 사주에 따라 명성황후가 일본의 낭인들에 의하여 시해되었으며, 이어서 단발령이 내려지게 되었다. 이러한 일제의 만행과 내정 간섭에 통분함을 금치 못하고 유생들이 중심이 되어 전국적인 의병운동이 전개되었다. 일찍이 경기도 여주(驪州) 일대에서 의병 운동을 전개한 민용호(閔龍鎬)가 경기의진의 하사 안승우(下沙 安承禹)의 합진 입대 권유를 사양하고 관동지방 진출이 보다 효과적일 것이라 생각하고 강릉(江陵)으로 권인규를 찾아 왔다. 권인규는 당시 강릉 일대에서 유력한 인물이며, 저명한 유학자로서 강릉 유림의 지도자였다. 민용호는 권인규에게 의병운동의 방향을 상세히 지도 받은 후 영동 일대의 의진과 연합하고 산군(山郡) 지방의 포수들을 모집하고 영동 9군 도창의소(嶺東九郡都倡義所)를 설치하고 이병채(李秉採) 최중봉(崔重峰) 등 의병장을 규합하였다. 이때 권인규는 민용호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보내어 의병운동을 격려하였다. "장군은 소년 서생(書生)으로 시서(詩書)만을 읽고 외며 예의(禮義)만을 강론(講論)하다가 시운이 불행하여 섬 오랑캐가 악한 짓을 거듭하고 나라의 형세가 위급하게 되었기 때문에 문(文)을 버리고 무(武)로 나온 것입니다. 먼저 소리쳐 의병을 일으켰는데, 계획하는 것이 정확하여 무인으로도 입을 벌리고 기운이 꺾이게 하니 이 얼마나 장한 일입니까. 오늘 장군이 하시는 일, 시설하는 것은 곧 관동9군 몇만 명 백성들의 생사 안위가 관련되는 것입니다……." 당대의 거유로서 일개 소년 문사의 의병 거사를 극구 찬양한 것은 민용호를 예하부대로 편입시키려던 권위주의적인 경기 의진의 유생 출신 의병장들과는 매우 대조적인 태도라 하겠다. 그밖에 이병채(李秉採)에게 편지를 보내어 의병운동의 방향제시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 또한 '예안(禮安) 창의소에 답한 통문', '창의 포고문', '창의 통문', '관동 창의소 포유문', '관동 창의사 효유문', '서고문' 등을 지어 각 고을의 의병운동을 격려하고 나아가서 아직 참여치 않은 제 인사들의 참여를 촉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글들은 그의 아들 권종해가 「소은 창의록(巢隱倡義錄)」이라는 제하에 단행본으로 묶어서 세상에 내었다. 이 글은 당시 의병운동의 분위기를 후세인에게 전하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8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