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page


61page

권종해선생은 강원도 강릉(江陵) 출신이다. 1906년 강릉 유림대표로 선정되어 성균관에 진정하고, 대동문우회(大同文友會) 및 법부 평의회(法部評議會)에 고소하여서 친일군수 이재화(李載和)와 친일 거부(巨富) 이근우(李根宇) 조익환(曺翊煥) 등에게 추방지시를 내리게 하였다. 고종황제가 양위(讓位)한 후에 "이제는 결사항전(決死抗戰)할 따름이다"하고 거의할 것을 결의하였다. 1907년 8월 군대해산이 일제에 의하여 강행되자 원주 병영(原州 兵營)에 가서 특무(特務) 민긍호(閔肯鎬)와 의무도통(義務都統) 이재희(李在熙) 및 지휘관 김도제(金道濟) 등과 구국광복운동전개 전략에 대하여 모의하였다. 여기에서 무기 1,800 자루를 얻어 의병 소모장(義兵召募將)이 되어 관동일대에서 소모활동을 전개하고 한편, 적과 접전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08년 2월 모집한 의병을 거느리고 이강년(李康 ) 의진과 합류하여 백담사(百潭寺) 전투에서 적과 접전하여 큰 전과를 올렸으며, 인제(麟蹄) 운두령(雲頭嶺)에서 동년 5월에는 정선군(旌善郡) 북면 단림(丹林)에서 적과 교전하였다. 6월 6일 적병은 그의 집에 침입하여 어머니 김씨를 타살하고 둘째 아들 증수(曾洙)를 총검으로 복부를 찔렀으며, 가옥을 전소시켜 복수하였다. 1909년 4월 양양(襄陽)으로 이진 하였다가 적의 밀정인 김성서(金聖瑞)의 밀고로 적에게 야습 당하여 크게 패전하였다. 1913년 서울의 김종익(金鍾翊)과 함께 의군부(義軍部)를 조직하고 유격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사주면(沙州面)의 장재호(張在鎬)의 집에서 체포되어 10년형을 언도받고 수감된지 6년만에 출옥하였다. 1919년 3 1운동이 일어나자 출옥한지 얼마 되지 않는 몸으로 다시 강원도, 충청북도 일대를 잠행하면서 지속적으로 무력항쟁을 획책하다가 그간의 행적이 적에게 노출되어 다시 체포되었으며, 무기형을 언도받고 투옥된지 4년만에 옥사 순국하였다. 이로써 관동 의병운동의 선구자인 부친 권인규(權仁奎), 그리고 그의 아들인 기수(基洙) 증수(曾洙)와 함께 3대가 의병운동에 앞장섬으로써 의병운동사상 찬란한 이름을 드러나게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