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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3.1독립만세운동 약사(略史) 강릉의 3.1독립만세운동은 1919년 4월 초순 읍내에서 시작되어, 강릉 외곽 면소재지로 확산되면서 그해 5월까지 지속되었다. 강릉3.1독립만세운동의 핵심적 인물과 주도적 역할을 한 조직체들은 강릉보통학교 이명의(李明儀)를 중심으로 한 학생 비밀결사조직, 강릉감리교회 안경록(安慶祿) 목사를 중심으로 한 신도 비밀결사조직, 강릉청년회 최선재(崔善在),조대현(曺大鉉),최선근(崔善根),최돈옥(崔燉玉),김진숙(金振淑),최돈제(崔燉濟),최선호(崔善浩),정식화(鄭軾和) 등의 청년 비밀결사조직, 초당리 창동회(昌働會)의 구성원이었던 최이집(崔頥集),최진규(崔晋圭),박장실(朴章實),최영방(崔永邦),김봉공(金鳳公),류옥일(柳玉一) 등 청년 비밀결사조직이었는 바 이들은 상호연계하여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만세운동계획은 최돈옥 등이 고종(高宗)의 인산(因山 : 3월 3일)에 참여한 뒤 귀향하여 중앙의 동향을 전하면서 은밀하고 면밀하게 추진되었다. 이들 청년·학생 중심의 비밀결사조직은 강릉감리교회 지하실에서, 이윤식(李允植)의 상점에서, 혹은 최선근의 상점에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제작하였다.만세운동의 거사일은 민중들이 많이 모이는 장날과 하평보(下坪洑) 공사가 있는 날로 결정하였다. 한편, 민중들의 적극적인 동참을 이끌어내기 위해 선창부(先唱部)와 해산방지부(解散防止部) 등 결사대도 조직하였다. 드디어 4월 1일,2일,3일,4일,5일,7일,8일 독립만세운동의 함성이 울려 퍼지게 되었다. 일본 경찰과 수비대의 무자비한 시위진압으로 주도자를 포함한 참가자들이 체포 연행됨으로써 만세운동은 집회와 해산이 반복되었다. 읍내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괭이,삽,가래 등을 든 농민들의 시가 시위로 이어졌다. 그러나, 일본경찰과 수비대의 총칼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이들과의 직접적 충들을 피해 화부산,남산,월대산 등지에서는 횃불시위로, 안목,강문 등에서는 선상(船上) 횃불시위로 전개되었다. 이와 같은 만세운동은 4월 중순에는 읍내 외곽으로 확산되어 거군적(擧郡的)인 양상으로 발전되어 5월까지 지속되었다. 4월 초에서 5월로 이어진 강릉 독립만세운동은 연인원 10,000여명이 참가하였다. 그 중 80여명이 부상하였고, 일본 경찰에 검거된 사람은 140여명이었다. 체포된 사람들은 주로 함흥지원(咸興支院)에 이송되어 일본 경찰의 모진 고문과 재판을 받고 복역하였다. 그간 확인된 복역자와 형량을 보면, 최선재.조대현(각. 징역 10월), 최선근(징역 6월), 최돈옥,김진숙(각. 징역 4월), 이명의(태 90), 최이집,최진규(각. 징역 4월), 박장실,최영방,김봉공(각. 태 90), 류옥일(기소유예), 정식화(태 90) 등 옥고를 치루었다. 3.1독립만세운동은 일제 강점기에 가장 빛나는 민족해방운동이었다. 이와 같은 항일투쟁정신은 암울했던 당시에 민족독립의 열망과 의지를 확인시켜주는 횃불이었다. 따라서 강릉지방의 독립만세운동 역시 이 지방의 주체적 역량과 민주시민사회의 발전을 담보하는 기념비적 의미를 갖는다. 이에 3.1독립만세운동 80주년을 맞아 이 지역사회에서 항일독립의 횃불을 높이 들었던 선인(先人)들의 뜻을 기리기 위해 간략하게 내력을 돌에 새겨 이곳에 세운다. 1999년 4월 13일 강릉 3.1독립만세운동 기념탑 건립 추진위원회 글 지은이 : 방동인·손종환·엄창섭·이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