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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을미)년 8월 20일 국모시해(國母弑害)와 11월 15일 국왕에 대한 강제삭발과 함께 단발령이 시행되니 전국 각지에서 토역복수(討逆復讐)를 크게 외치며 의병 봉기(蜂起)하였다. 경기도 지역 의병 창의대장 민승천(閔承天), 도지휘 김하락(金河洛), 도총 조성학(趙性學), 좌군장 김귀성(金貴星), 우군장 신용희(申龍熙), 선봉장 김태원(金泰元), 중장군 구연영(具然英), 소모관 전귀석(全貴錫), 돌격장 심종만(沈鍾萬), 우익장, 유격장 김경성(金敬誠), 대장 박준영(朴準英), 여주대장 심상희(沈相禧), 도령장 방춘식(方春植), 별패진군관 김순삼(金順三), 제1기 제1대의 십장 허봉룡(許奉龍) 관동 방면 의병 춘천 의진 대장 이소응(李昭應), 주장 이진응(李晋應), 이경응(李景應), 감역 홍시영(洪時永), 선비 이면수(李勉洙), 이수춘(李守春), 민영문(閔泳文), 유중락(柳重洛), 이만응(李晩應) 강릉 의진 유생 권인규(權仁圭), 한중보(韓仲甫), 오영도총독 권익현(權益顯), 도사 이승학(李承學), 유학 김노원(金魯元), 심홍택(沈鴻澤), 정규섭(丁圭燮), 감찰 이승찬(李承燦), 영리 최돈익(崔燉翼), 김양선(金養善), 임익상(林翼相), 오위장 정헌중(鄭憲仲), 김인수(金仁洙) 장리 전치운(全致雲), 한량 강동오(姜東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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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유린 피해 일본의 국가총동원법에 강제노역,강제징집,위안부 등으로 강제동원된 조선인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없고 모두 추정치이며 각 강제동원 사안별 인원도 정확하지 않으며, 목숨을 잃거나 다친 사람의 숫자도 정확하지 않다. ○ 약150만으로 추정되는 조선인이 해외 강제 노역에 끌려갔고, 600만여 명이 한반도에 강제노역을 당했다. ○ 일본에 강제징집된 군위안부의 수는 적게는 5만명에서 많게는 수십 만에 이를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렇게 나라를 되찾고자 일본과 싸운 독립 항쟁을 통하여 광복을 맞게 되지만 이어 1950년 6월 25일 1129일간 잊지 못할 이념갈등으로 남북이 갈라지고 6.25란 전쟁이 시작 동족간의 살상이 벌어져 역사의 큰 오점을 남기게 된다. 그 인명 피해는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국군 62만명, 유엔군 6만명, 북한군 93만명, 중공군 100만명, 민간인 250만명, 이재민 370만명, 전쟁 미망인 30만명, 전쟁고아 10만명, 이산가족 1000만명, 막대한 재산 피해 등을 입게되는 슬픈 역사를 이곳에 기록한다. 하여 후대에 전해 다시는 외침없는 강성한 나라를 만들 것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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