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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6월 5일 발송, 원문제목 : 육전대 입경에 대한 지령 문서번호 : 기밀수 737호, 발송자 : 西鄕從道-서향종도(海軍大臣:해군대신), 수신자 : 陸務宗光-육무종광(外務大臣:외무대신) 1894년 6월 12일(음5월9일) 일본혼성여단, 인천에 도착 1894년 7월 27일 갑오경장 시작으로 일본군인 400명의 육전대를 경성에 주둔하였다. 1895년 10월 8일(음8월20일)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사건) 발생하였다. 1895년 12월 30일 단발령 공포를 계기로 1차 의병봉기가 일어났다 1896년 1월 17일 강원도 원주에서 단발령에 반대하며, 의병이 봉기하여 군청을 습격 군수가 충주로 도망하는 일이 발생하였으며,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였다. 1904년 4월 3일 일본이 한국에 주차사령부 설치(駐箚司令部 設置)하였다. 1904년 8월 22일 제1차 한일협약 조인하였다. 1905년 11월 17일 제2차 한일협상조약(을사보호조약, 을사5조약)의 체결로 외교권이 박탈되자 국권회복의 일환으로 강원도 지역에서 발원하여 2차 의병항쟁이 과감하게 투쟁하였다. 1907년 6월 30일 헤이그 평화회의 밀사사건을 계기로, 1907년 7월 20일 고종 강제 퇴우 1907년 7월 24일 한일신협약(정미7조약, 이완용과 이등박문이 통감의 권한확대) 체결로 통치권 대부분이 일본에 넘겨졌다. 1907년 7월 31일 군대해산조칙을 발표하여, 한국군대가 강제로 해산되면서 3차 의병항쟁이 일어났다. 1907년 8월 1일 한국군대의 해산식에서 서울시위1연대 1대대장 박성환의 자결을 계기로 서울 시위대의 항전은 시가전으로 전개되고 곧이어 원주와 강화도에서도 의병의 봉기로 항전하여 군인들이 의병 대열로 참가하였다. 1907년 8월 5일 원주 진위대 장병이 봉기하여 원주 점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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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 의진 유학자 유중교(柳重敎), 유생 주용규(朱庸奎), 대장 이필희(李弼熙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후손), 참모장 군사 서상열(徐相烈), 대장 중군 이춘영(李春永), 군무도유사 안승우(安承禹), 창의대장 유인석(柳麟錫), 후군장 신지수(申芝秀), 선봉장 김백선(金伯善), 좌군장 원규상(元奎常), 우군장 안성해(安成海), 참모 박주순(朴胄淳), 사객 장충식(張忠植), 종사 이조승(李肇承), 종사 홍선표(洪善杓), 이기진(李起振), 정화용(鄭華鎔), 원용정(元容正), 정익(鄭瀷), 황주목(黃疇穆), 소모장 이문흠(李文欽), 신태홍(申泰洪), 박세화(朴世和), 왕응선(王膺善), 윤정섭(尹正燮), 이장회(李章會), 신영휴(申永休), 김병수(金炳遂), 중군 윤기영(尹基榮), 소모총독 김사정(金思鼎), 김사두(金思斗), 도령장 박운서(朴雲瑞), 의병장 윤의덕(尹義德), 손영국(孫永國), 전군장 홍대석(洪大錫) 명호치(鳴湖峙), 좌의장 우필규(禹弼圭) 파랑령, 좌군장 우기정(禹冀鼎), 박달령(朴達嶺), 별장 원우규(元友珪) 조호, 참진장 한동직(韓東直) 단정, 소모장 이범직(李範稙) 강령, 파수장 이향구 유현, 전군장 정운경(鄭雲慶), 좌군장 이희두(李熙斗), 우군 중군 윤영훈(尹永勳), 장의장 이완하(李完夏), 총령 정인설(鄭寅卨), 의병장 심상희(沈相禧), 중군장 원용석(元容錫), 전군장 전규석(全奎(貴)錫), 좌선봉 김용준(金容俊), 아장 이원하(李元厦), 부장 이원영(李元永), 참모관 권기수(權夔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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