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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의병운동 의병 운동은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민중이 일으킨 전통적 구국운동의 대표적 형태로 우리 민족의 강인한 저항정신을 표출한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그리고 보호국 체제하에서는 국권회복을 위한 무장투쟁을 주도했고 식민지 체제에서는 항일독립전쟁의 기반을 마련하여 항일운동사에 큰 맥을 형성하였으며,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에 대항하여 처절한 무장투쟁을 전개한 점에서 세계 약소민족의 독립운동사에도 큰 의미를 가진다. [ 항일의병 봉기의 경위와 항쟁 ] 일본이 우리나라에 침범하기 위한 술책과 항일 투쟁 의병의 봉기 1875년 4월부터 군함 운양호, 춘일호, 제2 정묘호, 맹춘호, 고웅호, 등이 우리나라의 동,서,남,해역을 횡행하면서 기동연습으로 위협하였다. 1876년 2월 11일 일본군함 운양호를 강화도 부근에 출동시켜 한강으로 들어오려 할 때 이를 목격한 강화도 남단 초 지진 포대의 발포로 충돌이 일어나 강화영에서 한일수호회담을 시작하여. 1876년 2월 26일 한일수호조약이 조인되었다. (강화조약, 병자수호조약) 1882년 7월 23일 임오군란 발생으로, 1882년 8월 30일 제물포조약이 체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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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대장 민용호(閔龍鎬) 전군장 강우서(姜禹瑞), 우군장 이병채(李秉採), 후군장 박한옥(朴漢玉), 좌군장 김원섭(金元燮), 최한식(崔漢寔), 소모장 권명수(權明洙), 이경환(李景煥), 김윤희(金允熙), 의병장 최중봉(崔重峰), 춘천의 의병장 김경달(金敬達), 유홍석(柳鴻錫), 원주의 의병장 이인영(李麟榮), 한동직(韓東直), 김병대(金炳大), 경희백(慶希伯), 강두동(姜斗東), 김종명(金鍾鳴), 홍천의 의병장 최삼여(崔三汝), 남궁영(南宮欞), 횡성의 의병장 권대형(權大亨), 박성묵(朴性默), 홍재귀(洪在龜), 영월의 의병장 엄성하(嚴聖河), 김시백(金時伯), 김시중(金時中), 삼적의 유진장 김헌경(金憲卿), 의병장 황청일(黃淸一), 김하규(金夏奎), 충청 방면 의병 홍주(洪州) 의진 문인관리 김복한(金福漢), 이설(李楔), 안창식(安昌植), 안병찬(安炳瓚), 부자 임한주(林翰周), 임승주(林承周), 형제, 이근주(李根周), 대흥(大興), 정산 박창로(朴昌魯), 정제기(鄭濟驥), 참모장 이세영(李世永), 이봉학(李鳳學), 이병승(李秉承), 소모관 송병직(宋秉稷), 홍건(洪楗), 이상린(李相麟), 김정하(金正河), 선봉장 정인희(鄭寅羲), 전수사 조의현(趙儀顯), 소모장 이중소(李重韶), 이상천(李相天), 소모관 채광묵(蔡光默), 소모관 이창서(李彰緖), 도지휘 김재은(金在殷), 첨전 황재현(黃載顯), 이경춘(李景春), 김홍제(金弘濟), 이관(李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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