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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모쿠신(生田目新)' 대좌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주전정미의병'은 수주면전투·주천 다래산전투·남면 창동리전투·영월 덕포리 독산(獨山, 여우고개)전투. 1907년 9월 3일 김삿갓면 밀동(密洞)전투와 와석리 도일바위전투 등을 승리로 이끌고 11월 16일 와석리 든돌에서 의병진을 재편성하였다. 특히 와석리 찬물나드리의 도일바위(屠日巖)전투에서 패한 일본군은 1907년 7월 26일 경주김씨 집성촌인 와석리 주실이 동네를 불태우고 서당 훈장인 김성희(金性熙)의 귀와 팔을 자르고 김도희(金道熙)·김일희(金日熙)·김정운(金正雲) 등을 살육하였다. 이후, 이강년 의병장이 1908년 청풍 까치성 전투에서 발목에 관통상을 입고 제천 수비대장 ‘키지마(貴島)’ 소위에게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되었다. 이강년(李康秊)이 순국하자 김상태 의병장은 ‘호좌창의대장(湖左倡義大將)’이 되어 격고문(檄告文)을 발표하고 영월·단양·영춘·순흥 등지에서 활발한 의병투쟁을 하였다. 1910년 3월 김상태는 양백지간(兩百之間)에서 의병항쟁을 전개했는데 김상태 의진은 전투 능력이 뛰어나 순흥과 단양 등지에 있는 일제의 수비시설을 파괴하고, 기습 전투로 일본군과 교전한 것이 무려 40여 회에 달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김상태 의병장은 밀정 우종응(禹鐘應)의 신고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