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립쟁취를 위한 운동은 가닥이 잡혔으니 그해 12월 임시정부의 대일선전포고 사실을 미국무성에 전달하고 정부로서의 승인을 요망하여 이 조항은 은 거절당했으나 한국교민을 일본국적에서 해제함으로써 항일전선에 함께 잠여할 수 있는 길이 열리어 교민중에서 OSS부대에 요원을 차출했을때는 앞장서 이에 응하였다가 연령초과로 좌절할뻔하였으나 대폭 낮추어 적어서 관철하기까지 하였다. 42년 입대하여 44년에는 미국정보학교를 졸업하였고 45년 5월에는 미군의 일원으로 일본본토에 상륙하는데 성공하였다. 드디어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으로 대망의 해방이 이룩되어 9월에 미군이 상륙하교 10월엔 이박사가 귀국했으며 12월에야 군복을 벗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는데 그로부터의 국내정세는 험난하기 전보다 더하였다. 10월에 독립촉성국민회의가 결성되었고 미군통치아래 혼미를 거듭하던 정국은 이듬해 12월 신탁통치안이 발표되자 온국민이 이에 반대하고 일어섰을때 좌익분자들이 하루 아침에 이에 찬동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어 38선이북의 공산세력과 목소리를 같이하니 통일국가를 세우기란 꿈꾸기도 어려운 지경에 빠져들고 말았다. 사태가 이쯤되자 이박사는 몸소 미국을 찾아 정부요로에 남한만의 정부수립이 불가피함을 역설하고 귀국길에는 상해에 들려 장개석총통과 면담하는 등 외교활동을 펼쳤는데 선생은 줄곧 이에 동행하며 지성으로 보필하였고 국제연합총회에 한국대표로 파견돼 크게 국론을 펼치며 열성을 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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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1948년 제헌국회가 개설되자 고향에서 출마해 의원에 당선되고 체신부장관으로 입각해 소지를 펼칠것같아 보였는데 갑자기 북괴가 가다렸다는듯이 남침을 감행해와 온국토가 전화에 휘말린중에서도 일부 욕심에 눈먼 政商輩(정상배)들이 대통령을 등에 업고 독재로 치닫는 현실에 환멸을 느껴 정치일선에서 물라났다가 대한중석광업회사 사장으로 재기용되니 이박사와의 교분에 끌린 처사라 從容(종용)히 본분을 지키니 은인하며 지내었다. 그러는 사이 한때 강원도도민회 회장직을 맡았었고 일본중앙대학교 동창회장직을 맡았었을떄는 동회에서 지원하는 마포중고등학교의 이사장직을 맡아 교육사업에 관심을 갖게되었다. 이어 단국대학교 대학원장직에 있었을때는 그동안 받은 보수를 모아 고스란히 장학금으로 내놓기도 하였다. 국내정국은 오랜 미궁끝에 4.19학생의거를 초래했고 사태수습에 나선 과도정부는 선생을 서울시장으로 맞았으니 그사이의 고결한 처신에 따른 인사였다. 다음 제2공화국정권에 이어 군사정부가 들어서니 선생은 정계와의 유대를 끊고 한가로이 야인의 생활로 돌아와 그 사이 못다한 신변정리에 들어갔으니 그 첫 공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