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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 8월 이강년 의병장이 단양군 청풍의 작성(鵲城, 일명 까지성) 전투에서 체포될 때까지 1년 3개월 동안 민긍호, 신돌석 의병대장과 연계하여 일제를 격퇴하는 등 큰 전과를 올렸다. 선생은 의병장으로 활약하던 중 왜군의 거센 저항에 못이겨 1908년 6월에 일본군에게 포로가 되었다. 선생은 왜군에게 의병대장이라고 대답하고 조금도 동요됨이 없었다. 기회를 엿보다 왜군 6~7명을 부상시키고 탈출에 성공하였으나 6월 4일 다시 체포되어 영월로 연행되었다. 6일후인 6월 10일 일본헌병대는 영월읍 오리정(五里亭, 오목)에서 영월군민을 모아놓고 눈을 빼고 목을 베어 잔인(殘忍)하게 처형하니 선생은 37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영월군민들은 선생의 영혼을 위무(慰撫)하고 애국애족하는 높은 뜻을 빛내기 위해 1995년 8월 15일 영월 금강공원에 선생의 순국비(殉國碑)를 세우고 후세의 교훈으로 삼고 있다. 선생의 독립운동 공적은 영월문화원 엄흥용 원장이 수년간 영월지역 독립유공자 발굴과 의병 현창사업을 추진하는 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