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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없었다. 그래서 선생은 곧 이곳에 교회를 짓고 학교를 설립하여 민중계몽과 종교운동에 힘썼다. 낮에는 학교와 부락을 보살피고 밤이면 교회에 모인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는 한편 조선이야기 동사략 등을 집필하는 등 뜨거운 정열을 쏟았다. 이때 설립한 학교가 한서중학교 한서국민학교의 전신인 연곡학교이다. 개화기 신교육기관인 학교가 이곳에 설립되자 각지에서 학생들이 운집하니 30~40대의 청,장년으로부터 각계각층의 제자들이 선생의 슬하로 모여들었다. 선생은 이들에게 독립정신을 심어주었고 의롭게 사는 길을 보여 주었다. 새벽이면 유리봉에 올라 「불의의 일본을 이땅에서 물리처 주소서, 이 민족에게 불의에 굴하지 않는 힘을 주소서」하고 간절히 기도하였다. 일하러 가세, 기러기, 무궁화 등 株(주)는 이 강산을 무궁화 동산으로 꾸며 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구국생활의 최후에는 무거운 십자가가 지워졌으니 71세 되던 해 12월에 일제의 쇠사슬에 묶여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것이다. 재옥 중에 일제의 모든 유감을 완강히 거절함으로 모진 고초를 받다가 병든 몸으로 풀려나와 향저에서 신음하다가 77세 되던 서기 1939년 을유 4월 5일 파란만장의 일생을 마치시니 선생의 유해는 생전에 선생을 존경하고 따르던 여러 제자 유지들의 옷소매를 적시는 가운데 설밀 물마지(모곡 점말, 앞산) 선영하에 뫼시었다가 일제가 물러간 후 1966년에 선생의 뜻이 숨쉬는 큰말 교회 앞에 이장하였으며 1977년에는 강원도 도민의 정성과 정부의 보조로써 유서 깊은 이곳 유리봉 하에 또 이장하여 뫼시고 성역화하기에 이르렀다. 선생은 생전에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였으나 그 거룩한 유덕으로 1962년에는 대한민국장을 그리고 1977년에는 건국국민장을 추증받았다. 선생의 배위 양혜덕 여사는 1866년 병인 9월 13일에 출생하여 1937년 정축 1월 20일에 유명을 달리하였으며 이곳 선생의 유택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