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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림 그리고 폐습 타파에 전력을 다하였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관계를 떠나 대한협회를 조직하고 동협회 회장으로 항일투쟁의 선봉에 섰으며 이어서 교육잡지 교육월보 등을 창간하니 이 역시 한국교육 잡지의 효시이다. 선생은 47세 때에 관동학회를 조직하여 강원도민에게 독립정신을 고취하다가 1910년 조선왕조의 사직이 무너지자 종교의 힘과 교육으로서 나라를 구하기로 결심하고 48세에는 기독교에 입교하였고 아울러 배화학당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곳에서 8년 동안 일제의 악랄한 탄압 아래서도 우리의 역사, 언문체법, 가정교육, 무궁화지도, 육아법 등의 책을 발간하고 많은 애국의 노래도 지었다. 선생이 56세 되던 해 일제의 강포는 날로 심해지고 민족적인 고통이 더욱 가중되자 울분의 심정을 말할길 없어 선향인 이 곳 심산궁곡 보리울을 찾아 낙향하였다 그러나 이 곳 에서도 선생은 깨우치지 못한 지방의 현실을 보고 한유하게 지낼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