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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혼의 등대 한서 남궁 선생 신도비명 병서 배달민족이 이 땅에 자리를 잡은 지 몇 천년 동안 수많은 선열들이 이 민족의 강성과 발전을 위하여 피와 땀을 아끼지 않았다. 이 중에 민족의 등대요, 신문화의 선봉인 한 분이 계시니 이분이 바로 여기에 잠드신 한서 남궁 억 선생이다. 국제 풍운이 험악 할 때 선생은 쓰러저 가는 국운을 바로 잡으려고 정치 언론 종교 교육운동에 진력하여 80 평생을 구국 운동에 바친 것이다. 선생은 서기 1863년 12월 27일에 한성부 왜송동에서 출생하셨으니 성은 남궁 명은 억 자는 치만으로 본관은 함열이며 한서는 별호이다. 부는 중추도사 영이요 모는 덕수 이씨시다. 유시로부터 가난한 편모슬하에서 자라나면서 한문공부를 하다가 당시에 국제정세를 앞서보고 미국인이 경영하는 영어학교에 입학하였다. 이 학교를 졸업한 후 24세에 고종황제 어전통역으로 31세에는 담곡부사로 부임했다가 그 이듬해 내부토목국장으로 전보 되었다. 재관당시 구식도시인 수도 한성부를 근대부시로 만들기 위해서 한국 최초의 공원인 파고다 공원을 만들었으며 고루한 관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부내의 도로를 확장하여 서울의 모습을 새롭게 하였으니 이것이 1895년의 일이다. 34세에 관계를 물러나 사회운동으로 구국의 길을 찾기 위하여 서재필 선생과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민족운동을 전개하고 이어 동지와 독립신문을 발행하면서 독립정신을 고취하다가 1898년에는 우리나라에서 일간지로는 처음으로 황성신문사를 창설하고 사장이 되어 민중을 계몽하면서 불의의 친일파를 비롯한 사대파와 싸우면서 날카로운 필봉으로 민중의 목탁 노릇을 다 하였으니 선생이야말로 언론계의 선각자이다. 40세에는 성주목사 그리고 이듬해에는 이양군수로 재관하면서 부패한 고관들의 토색에 완강히 항거하고 얼울한 백성을 보호하면서 교육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