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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을사늑약으로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은 일본은 1907년 마침내 한국 군대마저 강제해산시켰다. 이에 분개한 우국청년들은 국권회복을 위해 전국 각지에서 정미의병으로 봉기하였다. 원주 감영 진위대 소속 정교였던 한갑복(韓甲福)은 평소 알고 지내던 홍천 동면 덕우마을의 안응순(安應淳)을 찾아가 함께 의병을 조직하고 대장으로 추대되었다. 고문 안응순(安應淳), 책사 이병두(李炳斗), 연락책 김춘선(金春先)으로 구성된 의병부대는 수백 명의 군사로 홍천은 물론 지평, 원주, 횡성, 평창, 영월 등의 영서지역과 멀리 강릉에까지 진출하여 왜병에 치명타를 가하며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한갑복 의병장과 남은 군사들은 1907년 11월에 양덕원 전투와 대미산성 전투에 이어 11월 28일 동면 화방마을 가래골에서 숙영하던 중 왜병의 기습을 받아 22명의 대원들과 함께 치열한 접전 끝에 장렬하게 산화하였다. 이에 정부에서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지역주민 이제선(李悌善)의 증언을 토대로 원세동(元世東) 등 지역유지들이 수십 년간 자료를 찾아 마침내 전적지와 유해를 확인하였으며, 고귀한 그 충의를 만대에 기려 교훈으로 삼고자 홍천군민의 뜻을 모아 여기 추모비를 세운다. 조국에 바친 그 뜨거운 충혼, 겨레의 가슴속에 영원히 빛날지니 장하신 그 이름, 영령들이시여 편히 잠드소서. 2011년 10월 18일 홍천군수 허필홍 홍천문화원장 허기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