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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 남궁억 묘역 翰西 南宮憶 墓域 이 곳은 근대사의 선각자이며 독립운동가이신 '한서 남궁억' 선생이 겨레의 독립을 위해 기도하신 모곡리 〈보리울〉 유리봉이다. 철종(哲宗) 14년 〈1863년 12월 27일〉 남궁 영(南宮泳)의 아들로 태어나 고종(高宗)의 영어통역관으로 관직을 시작한 선생은 칠곡부사(漆谷府使), 내부토목국장(內部土木局長), 독립협회 총무 및 사법위원, 독립협회보 편집장, 황성신문 사장, 양양군수, 대한협회 회장, 관동학회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여섯 차례의 옥고와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섰다. 이러한 가운데 겨레의 독립이 민중의 자각과 실천에 있음을 주장하신 선생은 이를 실천에 옮기기 위해 1918년 12월 이곳 보리울(半谷)에 내려와 학교와 교회를 세우고 1939년 4월 5일 생을 마감하기까지 22년동안 무궁화 보급운동과 함께 1백여곡의 애국 사상가를 지으셨고, 조선이야기와 동사략(東史)등의 저술을 통하여 나라 잃은 겨레의 가슴에 희망을 심어주고 민족정신을 일깨우는데 전념하였다. 그러나 1933년 십자당(十字黨) 사건으로 생애 일곱 번째 옥고를 겪은 선생은 "내가 죽거든 과일나무 밑에 묻어 거름이나 되게 하라. 나는 독립을 보지 못하나 너희는 반드시 볼 것이니 독립후의 일을 위하여 준비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77세를 일기를 생애를 마치었다. 이에 선생의 숭고한 나라사랑 정신을 기리고자 홍천군민의 뜻을 모아 이곳에 묘역을 조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