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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중건기 1919년 4월 3일 김덕원 의사가 영도한 이곳 동창마을 기미만세운동은 독립을 염원해온 이 지역 3,000여 명 주민들의 피맺힌 항거였다. 그러나 일제의 무자비한 총칼에서 죽고 쫒기고 흩어지지 않으면 안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누구라도 잡히면 모진고문과 악형을 당해야 하는 상황에서 일제의 눈을 피해 몸을 숨기는 일이 어찌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더욱이 이곳에서 기미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김덕원의사에 대한 일제의 검거압박이 밤낮을 가리지 않는 판국에 어디에 몸을 숨겨 목숨을 보전하며 어디에 몸을 숨겨 뒷일을 도모할 수 있었겠는가? 이러한 때에 이곳 용호대에서 살고 있던중 농의 연규환이란 이가 있어 자기 집 다락방에 의사를 모셔 숨기기를 삼년여를 하였으니 자칫 멸문지화를 당할 상황속에서도 그 분의 의사에 대한 죽음을 초월한 충정과 용기는 참으로 갸륵하고 위대한 것이 아닐 수 없다 하겠다. 한평 남짓한 다락방에 숨어 짚신을 삼으며 삼년여의 피신생활을 할때의 의사의 심정은 어떠하였을까? 이곳에 쏟아 놓은 의사의 피맺힌 한과 독립에의 염원이 아직도 생생히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듯하니 지나는 이 멈춘 발걸음을 쉽게 옮길 수가 없다. 그러하기에 광복 50주년 동창만세운동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발기하여 이곳 이 자리에 다 쓸어져가던 옛집을 헐고 새로운 모습의 다락방집을 건립하게 되었으니 의사의 영령이 다시 돌아와 자리를 잡을 듯 감회가 깊다. 원래는 초가 흙집인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하고자 하였으나 김덕원의사의 한맺힌 독립에의 염원과 그 뼈아픈 조국애를 길이 후손에게 알리고 연규환 선생의 의사에 대한 죽음을 초월한 충정을 되새기고자 원목과 기와를 이용하여 천년을 기약하는 새로운 건축물로 중건하게 되었다. 기와는 달성에서 구은 가장 좋은 것이고 부연을 달아 중후한 모습을 갖추게 하였으며 시공은 문화재 기능공들이 맡아 하였다. 현판 '다락방' 글씨는 서예대가이신 김응현옹이 써주셨고 단청을 하여 옛스러움을 살리고자 하였으며 옆에 기념관을 지어 의사의 애국정신을 더욱 드높여 세상의 본이 되고자 하였다. 1997년 10월에 기공하여 1998년 7월 21일 현판식을 갖고 완성을 보기까지 자금과 정성을 다한 김창묵 회장의 노고가 그지없고 이 지역 주민들의 협조가 드높았음을 밝혀 고마움을 전한다. 천구백구십구년 팔월 십오일 춘천교육대학교 총장 문학박사 박민수 삼가짓고 강원대학교 교수 문학박사 황재국 삼가쓰다 김영기 삼가 새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