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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의 백의장군 김덕원 의사 추모비 때는 19세기 조선조 말엽 탐관오리의 횡포와 학정으로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헤매이고 특히 동학도(천도교인)에 대한 약탈과 추방은 극에 달하여 생존마저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1894(갑오)년 몸에 일어난 동학혁명은 이러한 부정부패를 뿌리뽑기 위한 제폭구민 보국안민의 민중혁명이었다. 그러나 불의에 일본군이 개입하게 되자 그해 9월에 동학 2세교조 해월 최시형 선생의 기포령에 따라 동학군이 총궐기하여 침략자 일본군과 관군을 상대로한 항일구국 혁명운동이 전국적으로 번져나갔다. 그리하여 이해 10월에 이곳 홍천군에서 차기석 대접주를 중심으로 혁명의 횃불을 높이 들고 앞장선 장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19세 청년 접주 김덕원 의사이다. 이 고장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난 김의사는 의사는 의(義) 용(勇) 지(智)를 겸비한 장골이었다. 당시 이 고장에서 집결한 천 수백명의 동학군은 한때 동창을 점거하였으나 관군을 상대로 서석면 풍암리 자작고개대접전에서 8백여명의 사상자를 내는 항전 끝에 천추의 한을 남기고 좌절되었다. 결국 동학혁명은 왜놈의 신무기 앞에 고배를 들었으나 위대한 혁명정신은 그후 1919년 기미 3.1 독립만세운동으로 승화되어 전국에 메아리치게 되자 이해 4월 3일 이곳 홍천군 동창마을에서는 동학군 김덕원 의사 주도 아래 내촌면 내면 화촌면 서석면 인제 기린면 일대에서 수천명이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격렬하게 대항하던 중 8열사가 왜놈들의 총탄에 맞아 쓸어졌으며 김덕원 의사는 깊은 총상을 입은 채 은신 생활 3년에 굶주림과 추위를 이기며 초인적인 항일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던 중 내촌면 장수원에서 왜놈에게 검거되어 충청형무소에서 4년간 옥고를 치루면서도 비밀리에 항일독립을 모의하다가 수차 심한 고문으로 중병까지 얻어 출옥하였다. 그로인해 김의사는 실명까지 겹치는 불운 속에서 전전하다가 그토록 그리던 조국광복의 기쁨도 누리지 못하시고 1928년 53세를 일기로 한 많은 생을 마감하셨다. 오호라! 우리 후학들은 아직도 님의 유해를 찾지 못한 죄책감에 머리 숙여 속죄할 뿐 오직 숭고한 님의 순국정신과 유지를 길이 받들어 계승할 것을 다짐하오니 님의 성령이시여. 하눌님의 감응으로 부디 성령 출세하시어 후손과 후학들의 심령 속에 무궁토록 장생하소서. 님께서 외친 보국안심 척왜구국의 고함이 메아리친 동창의 산하여! 왜놈의 총탄을 맞고도 불사조처럼 한 평생 불의와 싸우시다가 홍천의 수호신이 되어 조국의 품에 잠드신 님이시여! 님의 얼은 정녕 동학의 얼 일지니 조국을 통일하고 온누리가 하나되는 지상천국을 꽃 피우게 하소서! - 1998년 3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