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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원 의사 추모비 이 고을의 원근은 신라 경순왕 후예들이 망국의 한을 품고 조국의 재건을 위해 항려운동을 한 유서깊은 곳이다. 그들은 척박한 황무지를 개척하여 논과 밭을 일구어 해마다 풍년이 드는 살기 좋은 고장을 만들었다. 그들은 또 집집마다 책 읽는 소리가 그치지 않는 향촌을 이뤄 조선왕조 건국의 역군들을 길러냈다. 그러나 19세기말 일제 침략으로 나라의 운명이 기울기 시작하자 이 고을에도 전란의 여파가 밀려들었다.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더니 인근 서석면 풍암리에서 최후의 격전이 벌어졌다. 조국 신라를 되찾으려던 마의태자의 변신인양 김덕원 의사가 나타난 것은 바로 이때였다. 그는 19세의 젊은 나이로 동학군의 선봉이 되어 용명을 떨쳤으나 애석하게도 분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김의사는 이에 굴하지 않고 재기의 기회를 노리다가 마침내 1919년 기미만세운동을 일으켰으니 4월 3일 홍천군 인제군의 5개면에서 3천여 군중을 모아 대한독립만세 시위를 벌였던 것이다. 그날 단상에 오른 김의사는 자유와 독립을 위해 최후의 일각까지 싸우자라고 역설하였고 군중은 이에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소리높여 외쳤다. 그러나 이때 비열한 일본 경찰들은 군중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하였으니 여덟 열사가 총탄에 맞아 순국하고 100여명이 피를 흘리며 땅에 쓰러졌다. 김의사는 요행히 은신할 수 있었으나 집은 일경의 방화로 잿더미가 되고 가족은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 김의사는 3년간 혹은 토굴 속에서 혹은 남의 집 다락방에 숨어지내면서도 이 나라 광복을 위한 일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불행히 일경에게 체포되어 형언할 수 없는 고문을 당하고 옥에 갇히게 되었다. 4년 뒤 옥고를 치루고 감옥을 나설 때는 김의사의 눈은 멀고 몸은 불구가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끝내 고문의 여독을 이기지 못하여 53세를 일기로 망국의 한을 품은 채 생을 마치었으니 이것이 동창마을의 한이요 원인 것이다. 오호라 묻노니 누가 이 한을 풀어드릴 것이며 누가 원을 갚아드릴 것인가. 여기 동창마을을 찾는 이들이여! 이 나라 이 겨레를 위해 숨진 애국선열의 정신을 생각하고 내가 지금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다시금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기로 하자. 서기 1998년 3월 1일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박성수 삼가짓고 강원대학교 교수 문학박사 황재국 삼가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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