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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창 4.3 독립운동 기념비 여기 기미년 강원도 홍천군 동창마을 4.3운동에 적수공권으로 봉기하여 일본제국주의와 싸웠던 장두 김덕원 의사와 8열사와 군민들의 성스러운 애국혈의 뜻과 독립만세 함성의 의지를 새기니 그 애국정신 자손만대에 영구히 계승되고 삼천리 온나라에 퍼져나가리라. 김덕원 의사는 이미 19세에 동학농민 혁명운동에 가담하여 홍천군 서석면 농암리 자작고개 전투에서 1천명의 농민들과 함께 일본군 및 관군과 격전을 벌리어 조국강토에서 외세를 몰아내고 압제받던 농민들의 자유를 위해 싸웠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국권을 강탈하자 통탄하다가 기미년 4.3운동에는 3월 내내 홍천군 내촌면 화촌면 서석면 내면과 인제군 기린면의 2개군 4개면을 돌면서 그의 마방을 거점으로 연락하고 조직하여 교통 중심지인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 동창마을에 3천여명이 운집해서 독립만세를 부르게 되었다. 기미년 4월 3일 아침 동창마을 시장마당의 다리목에서 태극기를 나누어 받은 3천 여 시위 군중들은 장터마당을 가득메우고 비석거리는 논밭에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들은 글방 앞에 대형 태극기를 세우고 김덕원 의사의 궐기 연설을 들은 후 천지를 진동하는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3천 여 군중들이 외치는 독문만세의 함성은 천지를 진동할 듯이 강원도와 전국에 메아리쳐 나갔다. 출동한 일제 헌병대는 평화적으로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하는 군중들에게 야수적 무차별 집중사격을 가하여 현장에서 이순극, 전영균, 이기선, 연의진, 이여선, 전기홍, 양도준, 김자희 등 여덟분이 순국하고 수십명이 중상을 입어 애국의 성스러운 피가 동창마을 조국의 흙을 물들여 적셨다. 일제는 동창마을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김덕원 의사를 체포 투옥하려고 혈안이 되어 날뛰었다. 김의사는 친지집 다락방에 3년여동안 은신하면서도 어두운 밤에는 몰래 동산에 올라 하늘을 우러러 이 나라와 이 겨레를 구해주소서라고 간구하였다. 그는 부모님 제사를 지내러 가던 중 잠복한 일경에게 잡히고 말았다. 김의사의 집은 거사 당일 일제에 의해 불태워졌으며 그의 부인과 가족들도 가혹한 고문을 당하고 온 집안이 일제의 탄압으로 풍비박산되었고 자산은 모두 빼앗기고 잃어버렸다. 김의사는 일제에 의해 온갖 잔혹한 고문을 당하고 고춘천형무소에서 4년 여의 옥고를 치른 후 출옥하였지만 그는 일제의 모진 고문으로 두 눈이 실명되어 처참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김의사는 고향을 떠나 각지를 전전하다가 그의 불구가 된 애국의 몸을 조국 땅에 묻었다. 그러나 그가 언제 어디에 묻혔는지 오늘날은 묘소조차 찾을 길이 없게 되었다. 김의사와 선열들의 흘린 피와 애국정성이 헛되지 않아서 생명을 바쳐 소망하던 민족광복의 찬란한 태양이 솟아오른지도 어느덧 40여성상이 되었다. 그러나 이처럼 장렬한 김의사와 선열들의 애국적 위업은 한낱 이 고장 항간의 이야기로 초목에 묻힌 채 80성상이 흘렀다. 역사의 무상함이여 어찌 그만시 지탄과 불초의자 꾀함을 회오치 않을리 있겠는가. 김덕원 할아버지의 처연한 눈먼 모 모습을 스쳐보며 그 실명 이유를 알지 못한 종손 어린소년이 일찍이 고향을 떠나 만주벌판을 유랑하다가 돌아와 이제는 백발의 김창묵 옹이 되어 실명 이유를 알고 덕원의사와 선열들의 애국정신현창사업을 감동적으로 현장에서 전개하고 있다. 김의사와 동창마을 순국자 애들의 발자취를 따라 기미만세공원 팔열사각 덕원산길 청로각 앙천루 등의 기념물과 기념비를 건립하여 김덕원 의사와 순국선열들의 애국충절을 추모하고 애국현장을 가꾸어 민족혼과 애국정신을 온누리에 현창하였다. 이제 김덕원 의사와 여덟 순국 선열과 애국지사들의 성스러운 피가 스며있는 이 성지에 기념비를 세워 순국하신 님들의 민족혼과 애국정신을 새김은 우리 동포 모두의 가슴속에 나라사랑과 겨레사랑의 숭고한 정신을 계승하자는 다짐이다. 김덕원 의사와 여덟열사와 동창마을 4.3운동 애국선열들의 성스러운 의혈과 애국정신은 우리민족사에 영원하리라. 찬란하리라. - 1999년 4월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