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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정의감이 뛰어났다. 국운이 불행하여 왜국에 의해 강제로 을사보호조약이 맺어지고 국권이 말살되려는 시점에서 이 나라의 독립을 쟁취하여 국권을 회복하려는 을미년 3월 1일 인류사상 유례없는 민족적인 독립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만세소리가 건곤을 진동시켰다. 시운을 같이하여 두메 동창에도 미국 여선교사가 자주독립정신과 개화의 물결을 일으키기 시작 서울 홍천 양양으로 이어지는 독립운동 통신로가 순조롭게 연결되어 수차의 밀회를 거듭한 끝에 김덕원 지사를 대표로 인근 5개면(내촌 화촌 서석 내면 인제)에서 운집한 1천 5백여 명의 청장년들이 동년 3월 3일 정오 숨겼던 태극기를 일제히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쳐 잠자는 강산을 일깨웠고 민족정기를 선양하였으나 애통하게도 왜적 헌병과 순사의 비인도적 만행에 항거하다가 무자비하게 쏘아대는 적의 총탄에 애국의 꽃잎이 한 잎 두 잎 떨어져갔다. 순식간에 이순극 전영균 이기선 정의진 김자선 김기홍 이여선 양도준 등 8명이 순국하고 20여 명이 중경상을 입은 후 무산하게 되었다. 당시 선생은 향년 49세로서 독립의 한을 풀지 못하고 생을 마치었다. 국가에서는 선생의 자주독립과 애국정신의 공을 기리기 위해 단기 4323년 광복절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고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후세에게 영원토록 계승시키기 위해 내촌면 물걸리 서가 대갑좌에 모시었던 묘를 이곳에 천장하였다. 배는 평해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