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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원 의사 항일투쟁사적비 경주 중천재 주인 김충열 경제 관동치하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 동창마을에서 출생하여 기미년 3.1운동을 주도한 애국지사가 있으니 즉 김덕원 의사이다. 의사는 경주김씨요 선계는 신라 대보 휘 관지공으로 위시조하고 신라말 장군공 휘 순웅을 위중시조하여 조선조 개국공신 의정부 좌찬성 봉진림광 시 제숙 휘 균으로 위현조하고 청사의 거울인 육조(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청백리로 선입된 한성판윤 시 공호공 휘 종순은 의사의 17대조가 되신다. 부 휘 정준공은 통정대부 선략장군 용려위 부사과 였으며 모는 숙부인 경주최씨이다. 공은 서기 1876년 11월 26일 출생하니 기골이 장엄하고 지략이 탁하여 자유로 솔군작전과 의용투지가 발군하니 인개 왈 무관지자의 특성이라 전하다. 당시 조정은 고종황제 유충으로 대원군이 섭정할새 쇄국양이 주의를 견지하다가 하야후 민승호 일파가 득세 중 고종 을해에 일본군이 강화도에 침입 위협하고 초지진 영종진을 맹폭하여 인천에 상륙 침공하니 교전 연패로 강화면전이나 국운 점쇠하야 광무 9년에 이등박문이 내조하여 을사조약체결로 외교권을 일제에게 박탈당하니 황성신문은 시일야방성대곡이란 논설 제재로 정간되고 민영환 조병세 홍만식 등이 자결하니 당시 의사는 29세라 동학농민과 동지를 규합하여 자결충신에게 설위조곡하고 일제야욕을 규탄결의하였다. 오호라! 순종 4년 경술 8월 22일 한일합방조약이 체결되고 신임 통감에 사내정의(테라우찌)가 침래하여 통치권을 장악하니 종묘사직은 일조폐문이요 삼천만 민족은 혈누성천이라 김의사가 망국지탄여에 지제3일하고 여동지로 제천고유 왈 황천은 하찰하소서 천무 2일이요 지무 2주 어늘 주상 건재에 왜인통치는 천리위반이오니 즉각 추출하소서 고필에 초연정금하고 서남방지역인 남한강을 중심으로 배일사상과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마방설치로 연락 촉진하니 문자 막래호응이라 애재라 고종황제 승하하시도다 인산 3일전 3월 1일 한양 탑동공원에서 대호독립만세하고 파급 지방할새 강원도는 4월 1일 춘천의 궐기를 위시하여 4월 3일 장두 김덕원 주도하에 동창마을에서 내촌면 화촌면 서석면 내면 인제군 기린면 등 5개면 3천 군중이 궐기하여 강점 약탈당한 국권을 회복하여 자손만대에 번영을 이룩하기 위해 살신보국하자는 장두의 궐기사가 있자 대한독립만세소리가 천기를 진동하였다. 계속되는 운동으로 8열사가 희생되고 동참 인사는 명문중 지사 유림들과 농민 천도교 기독교 급도로 부역인부까지 합세하였다. 왜경이 연일 담총 출동으로 다수 체포 수감되고 혹독한 고문으로 희생자 다출하였으며 김의사는 천석거부가 영구이패하고 부인 김해김씨로부터 치호 창흥 형제를 득하였으나 가세지패로 학문을 미수하고 용식지계로 근근 생애하니 자는 국망즉 충신가도 역망하는 원리인가. 김의사는 일경의 수사망을 피하여 척야산하 용호대 다락방에 은신하고 야즉 덕원산길을 왕래하며 풍찬노숙하고 일경이 내습하면 청로봉 앙천봉에서 은신하며 국망의 한을 천지신명께 호소하니라. 3년간 무사 피신 이러니 선고 제일밤 참사차 하산 도중 잠복 왜경에게 체포되어 처역 중 가혹한 고문과 옥고 여독으로 양안이 실명되고 지체불용의 병객으로 여생을 보내다가 사세하였으니 충정은 천추불멸이요 청사에 민족 귀감이라 현재 충혼이 척강하는 사적지에는 청로각이 숙연하고 앙천루가 홀연하다. 광복 50주년 동창만세운동 기념사업 추진위원회에서 지역을 성역화함에 치하여 그 사업의 일환으로 사적비를 건립하고자 나에게 현석문을 청하는고로 의사의 항일투쟁사를 고빙하여서 여우 기술하고 후지군자들의 명람을 기대하노라. 을해 소춘 원임 성균관관장 밀양후인 박중훈 근찬, 1998년 무인 3월 1일 강원대학교교수 평해후인 황재국 근서, 각자 이창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