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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진(金正鎭)은 대구상업학교 재학중 1943년 4월에 동교생 이상호(李相虎) 등이 주도하여 조직한 항일학생결사 태극단(太極團)에 가입 활약하였다. 1942년 5월에 결성된 태극단은 조국독립을 위한 비밀결사로서 전국적 조직을 통한 무력항쟁을 목적으로 하였다. 따라서 동단원들은 우선 조직확대를 위해 동지포섭 활동에 힘을 쏟았다. 1943년 5월에는 그동안 가입한 단원 전원이 대구시 앞산이 비파산(琵琶山) 약수터에 모여 결단식을 갖고, 구체적 투쟁방안에 관하여 협의하고 조직을 정비하였다. 태극단의 조직은 크게 일반조직, 특수조직으로 나누었으며 최고의결기관으로서 간부회의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일반조직은 다시 육성부(育成府) 아래 3국(局), 10여부(部)를 두었으며, 특수조직은 건아대(健兒隊)라 칭하여 중학교 1, 2학년생과 국민학교 상급반 학생을 대원으로 가입시켜 장차 단원으로 육성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이때 그는 비서장 및 관방국 경제부장으로 활동하였다. 태극단의 투쟁방략은 조직확대를 통하여 전국의 학교와 각 지역별로 조직을 완성한 후 여론을 환기시키며 본격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는 것인데, 만약 국내에서의 투쟁이 여의치 못할 때에는 중국으로 집단 망명하여 그곳에서 항쟁을 계속한다는 계획도 세웠다. 그리하여 단원들은 용두산(龍頭山)·비파산 등 비밀장소를 이용하여 학술연구토론회, 각종 체육회를 개최하여 동지간 유대의식과 민족적 교양의 함양 및 체력증강에 노력하였다. 또한 궁극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군사학 연구에도 정진하여 군사관계서적의 번역, 글라이더 및 폭발물 제조에 관한 연구도 추진하였다. 그러나 1943년 5월 배반자의 밀고로 태극단의 조직과 활동이 일경에 발각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그는 학교에서 수업도중 동지들과 함께 피체되었다. 그는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44년 1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단기 2년, 장기 3년형을 언도받고 김천소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8·15광복으로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