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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세연(權世淵, 1836 ~ 1899) 의병장은 자는 조원, 호는 성대(星臺)로 충재 권벌(沖齋 權橃)선생의 12세 손이며 창설재 권두경 선생의 7대 주손으로 이곳에서 출생하였다. 권세연 의병장은 을미사변과 단발령 시행 등 일본의 국권침탈 야욕이 본격화되자 1895년 12월 초에 안동 봉정사에서 거병을 논의하였다. 이어 다음해 1월 20일 안동 삼우당에서 유림 대표들에 의해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권세연은 의병의 본부를 향교에 차리고 "경상도 안동 창의대장 권세연격(慶尙道 安東倡義大將 權世淵檄)"을 발표하여 주변에서 의병들을 모집하였다. 그리고 이튿날 1월 21일 연무정에서 안동의진을 편성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안동의 관찰사부를 점령하고 무기를 빼앗았다. 이때 안동의 관찰사 김석중이 달아났다. 그러나 무기가 없고 병사를 모르는 유생들이 모였기 때문에 곧이어 김석중에게 무너졌다. 권세연은 이에 굴하지 않고 김도현, 유시연등과 합류하여 2월 중순경에 다시 안동부를 점령하였다. 그리고 김석중은 도망가다가 문경에서 이강년에게 붙잡혀 처형되었다. 권세연의 의병부대는 유림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정규 군사훈련을 받은 관군에 대항해서 싸우기에는 한계가 있었음에도 권세연이 의병장으로 있을 당시 전과를 많이 올렸다. 하지만 그의 나이 60이 넘은 터라 이에 의병장을 물려주고 뒤에서 항일운동을 계속 전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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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세연 의병장 생가.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충재길 32-1(유곡리 972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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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공로로 1990년 건국훈장 애국징이 추서되었다. 참고로, 권세연 의병장은 상해임시정부 초대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선생의 외삼촌이며, 이 집은 석주 선생의 외가이기도 하다. 또한 의병장의 맏손자 권병섭(權昺燮, 1885~1964)은 1919년 파리강화 회의에 한국 독립을 호소하는 서한을 보내기 위한 파리장서 사건에 134명의 서명자 중 한명으로 참여하였으며, 둘째 손자(권경섭(權景燮, 1890~1943)도 신간회 봉화지회 조직 운영에 가담하여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