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page


71page

평해(平海) 일오 황병문(黃炳文), 백랑(白浪) 안규원(安奎源) 외 제공(諸公)의 선두영도(先頭領導)로 일거 수백호가 도만(渡滿)하여 연강제현(沿江諸縣)에 정착하면서 만인토지(滿人土地)를 조자임대(租子賃貸)로 영농하고 학교도 설립하였다. 후방의 이러한 모든 준비에 선생은 재정원조(財政援助)를 계속하시었으며 그동안 적헌병(敵憲兵) 망양분견소(望洋分遣所)에 누차 호출을 당하여 감금도 되었다. 1912년 유하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에 도착하여 성재(省齋) 이시영(李始榮) 선생을 도와 신흥학교(新興學校) 설립에 재정적 후원을 하여 가면서 영농주선(營農周旋)에도 심혈을 다하시었다. 1913년 춘에 재서비리아(在西比利亞) 대한국민의회에 참석하시어 문창범(文昌範) 외 제 동지들과 결사구국을 맹약하고 니코리스크에서 이상설(李相卨) 선생을 문병한 후 동만귀로(東滿歸路)에 동청철도(東淸鐵道)로 제제합이(齊齊哈爾)에 올라가 흑룡강성도(黑龍江省都)에서 장종창독군(張宗昌督軍)을 예방하고 필담으로 한국독립운동(韓國獨立運動)에 관한 심회(心懷)를 통한 바 장 독군(張督軍)은 필답(筆答)으로 조선형제일양적극보한족(朝鮮兄弟一樣的極保韓族)이라 하고 후대(厚待)도 받으셨다. 1914년 1차세계대전이 발발함에 선생은 독립군 투사들과 자주 자리를 같이 하면서 약한 힘이나마 우리는 더욱 공고히 하여야 된다 하시고 모든 외사(外事)에 참여하시었다. 적나남사단(敵羅南師團)의 국경수비대(國境守備隊)는 우리 독립군의 월강기습(越江奇襲)을 당하여 많은 희생을 자주 보게 되여 차(此)의 보복전(報復戰)으로 연강(沿江) 독립군에게 끊임없는 수색토벌(搜索討伐)을 가하여 왔으며 그 야수적(野獸的) 만행은 교포부락(僑胞部落)에 방화하고 천인이 공노할 무고(無辜)한 아녀자까지도 총검살상(銃劍殺傷)을 자행(恣行)하였다. 우리 군대는 지리를 잘 이용하여 사살격퇴(射殺擊退)를 여러 차례 하고 있었다. 1919년 3월 1일 대한독립선언운동(大韓獨立宣言運動)이 국내외에서 궐기되어 세계열강에게 한민족의 자주 독립성을 선양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상해(上海) 불조계 (佛租界) 내에 수립하게 되었다. 만주에서는 임정서로군정서(臨政西路軍政署)를 설치하고 이상룡(李相龍) 선생이 독판(督辦)으로 추대되어 상해와 만주 간에 긴밀한 유대를 가지고 있었다. 선생은 차 단합에 있어서도 박경종(朴慶鍾), 주진수(朱鎭壽) 제 동지와 함께 진력(盡力)하시었고 그후 상해임정(上海臨政)에 가셔서 제 요인을 만나 자금 조달의 중임을 분담하고 길림성(吉林省)으로 돌아오셨다. 1923년 유하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에서 밀양인(密陽人) 윤필환(尹弼煥)에게 자금조달(資金調達)의 임무를 맡겨 국내로 보내었다. 대구에서 구년흠(具年欽)과 양근환(梁槿煥)이 합력하여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양근환(梁槿煥)은 상해로, 구년흠(具年欽)은 영안현(寧安縣)에서 선생과 상봉하였고 윤필환(尹弼煥)은 밀양(密陽)에서 적경(敵警)에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1925년 상해임정(上海臨政)에서 이상룡(李相龍) 선생을 국무령(國務領)으로 기용하게 되어 선생은 이석주장(李石洲丈)과 함께 상해로 향하게 되니 모든 일에 청렴결백한 국오(菊塢) 선생에게 재정의 중임을 맡아보게 한 것이었다. 한때 교통부차장(交通部次長)으로 선생을 내정까지 하였으나 석주장(石洲丈)은 3개월 만에 사퇴함에 또 함께 길림성(吉林省) 서란(舒蘭)으로 돌아오셔서 혈서로 국내지인(國內知人)과 본댁에까지 호소문(呼訴文)을 발송한 후 유하현(柳河縣)으로 가셨다가 동년 8월에 국내로 잠입하여 입수한 자금을 송치(送致)하고 신병이 인발(因發)되어 자택에서 경찰의 요시찰(要視察)을 받아가면서 치료하고 계셨다. 1927년 2월 15일 당시 전국 내 각파 단체가 모든 분야의 편견(片見)에서 활동하던 15단체를 발전적으로 해소하고 민족단일협동전선신간회(民族單一協同戰線新幹會)가 창립되어 3만 회원에 위원장으로 김병로(金炳魯) 변호사가 추선(推選)되고, 우리 울진에서는 국오(菊塢) 선생이 지부장(支部長)으로 선임되어 모든 새 사업에 건투(健鬪)하여 왔으나 과감한 항일 운동은 일제의 만주사변 시발의 계기로 1931년 5월 17일 전국적으로 적경(敵警)의 강제 폐쇄를 당하였다. 선생은 그 후 금강산에 은거하여 국제 추세를 관망하시던 중 국외풍상(國外風霜) 십여 년에 병약되신 몸은 중태로서 귀가하여 광복의 기쁨을 못 보시고 차세(此世)를 영별(永別)하시니